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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도 Dec 31. 2023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야

서로 돌보는 공동체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셰어하우스에 오래 살면서 서울에 상경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사회초년생들이 독립할 때 선택하게 되는 셰어하우스에는 주머니도 마음도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가진 돈이 없어 마음의 여유를 내기 어렵고 생존을 위해 할 일을 찾고 돈과 시간을 바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내일을 만들어가보려고 애써보는 인생들이 모였었다.


나도 비슷하게 살고 있으면서 다른 이들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그 중에 별거 아닌 것으로 갈등이 심화되어 집을 나간 친구가 있는데 몇 년이 흘러 우연히 그 친구 프사를 보면서 역시 그 친구가 아팠구나 싶다.


수백개의 감사일기와 성경공부, 정신재활시설에서 도움받는 내용들을 프사에 일기처럼 기록한 수백개의 사진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다 알 수는 없지만 종교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의지를 내어 조금씩 나아지는 중인 것 같았다. 그래, 우리가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 그럼에도 한켠에 드는 생각은 종교는 하는 걸 왜 우리 커뮤니티는 하지 못했을까. 서로 곁을 내주고 도우며 산다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타인과 어떤 관계까지 만들어볼 수 있을까.


오랜 시간 타인과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돌보며 사는 것을 이상했다. 더 정확히는 나와 마음 맞는 사람들과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의지하며 살길 바랐다. 성애적 관계의 한계를 넘어 그런 관계망이 이루어지길, 그 안에서 행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내린 나의 결론은 내 민낯을 보이고 불같이 싸웠다가도 칼로 물베기처럼 슥 말을 건네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 가족이나 애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좋은 것만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찌질한 모습도 내보일 수 있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싸우고도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관계는 연인이나 가족뿐인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것이 오답이길 바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던 것 같다. (이건 2023년의 나의 답이지 이것이 모두에게 답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이상을 꿈꾼다.)


종교가 하는 걸 내가 속한 협동조합에선 할 수 없었을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데 안타까움을 가까이서 보는 사람이 겪는 부침이 늘 있었다. 돌아보면 나는 그런 감정을 잘 못 다뤘던 것 같다. 교생일 때도 친구들과 못 어울리거나 자존감이 약한 친구들 보면 어찌나 마음이 쓰이고 속상하고 감정이 이입되던지. 그게 괴로워서 교사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교사다. (웃음)


지금은 담임이 아니라 비교적 감정적 동요가 덜하지만 자신은 필요없는 존재라규 시도때도 없이 말하는 누군가를 보면 자꾸 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가 원하는 것일까? 상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연민의 감정이 스스로를 충족하려고 하고 싶은 행동은 아닐까.


아름다운거게애서 수익나눔 하면서 정말 잘 해야할 것 같아서 애썼던 생각도 나고, 보육원 퇴소 청소년들이 안타까워 한참 애정을 보내던 시간들도 생각이 난다.


나는 결정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않았고 막상 하려고 해도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내가 원하는대로 바꾸고 싶다는 것도 오만이고 내 인생 하나도 겨우 붙들고 살고 있었다. 누가 누굴 도울 수 있을까. 늘 돕고 싶었고 돕고 싶었지만 발동동 마음 동동거리던 시간들에 카톡 프사 몇 백개를 다 보며 또 과거로 마음이 거슬러 올라간다.


어쨌든 그 친구,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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