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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도sido Apr 29. 2021

우리가 사랑하는 일

'김지연_사랑하는 일'을읽고


은호는 여자 친구 영지가 자신과의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을 의심한다. 둘은 섹스에서 만큼은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다가 결국 은호가 다른 파트너를 구해 섹스를 하더라도 영지가 이해한다는 조건으로 나름의 타협을 본다. 타협 이후에도 은호는 종종 영지의 마음을 의심하는데, 사랑한다면 어떻게 서로의 몸을 탐하지 않고 배길 수 있냐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의심 끝에서도 은호는 영지를 사랑한다. 영지는 사랑하는 일에 섹스가 과대평가되었다 생각하는 쪽이고 은호는 그 반대다. 둘이서는 끝까지 이 문제를 파고들 수도 있겠지만 은호와 영지에겐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많다. 그 둘은 여자, 그러니까 한국에 사는 레즈비언 커플이기 때문이다.


은호는 섹스도 하지 않고, 결혼 제도로 묶일 수도 없는 동성 영지와의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그 답을 내리기 전에 아빠와 할머니를 만나야 한다. 커밍아웃으로 물 건너간 듯 보였던 유산 상속 기회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은호는 그 과정에서 영지와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세상이 인정해 주는 사랑들도 별거 없다는 것을 이제 막 이혼한 아빠와, 이제 막 결혼한 남동생, 죽어가는 할머니가 보여준다. 헤테로들은 무조건 자기가 하는 것을 사랑이라 우기는데, 은호와 영지만 그런 걸 증명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 은호와 영지의 이야기는 둘만의 시간에서 (섹스 없이도) 사랑을 확신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그려놓은 사랑하는 일이라는 건 그 누구와의 영원을 꿈꾸는 일이거나, 누군가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일인 듯하다. 너희들의 사랑이 옳은 일인지 증명하라는 세상의 소음을 음소거해놓고, 오직 둘 만의 시간에서 사랑을 확신하는 둘의 모습은 아름답다. 사랑은 너무나도 당사자들만의 문제이니까 누구든 다른 이에게 그걸 증명할 이유는 없고, 은호는 결국 그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누군가의 인정 없이도, 사랑은 그냥 '사랑'이라는 것.




소설을 덮고 제목에 대해 오래 곱씹어 봤다.

내게 사랑하는 일이란 서로의 행복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는 일이다. 나는 엄마의 행복을 염려한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을 때엔 무슨 일이라도 하며 엄마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거나, 엄마가 재밌어할 만한 영상을 들이민다. 이것 . 여기 재밌게 웃을 거리가 있어. 힘들게 일을 끝마친 엄마의 저녁 그릇을 먼저 일어나 치운다. 나는 언니의 행복도 염려한다. 친구들의 행복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이들이 슬프거나 우울한 모습을 보이면,  소중한 이들의 행복을 앗아간  무엇인지 찾아내 그것들을 응징하고 싶어 진다. 친구를 배신한 애인이라던가, 언니를 이유 없이 괴롭히는 직장 상사 같은 것들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어 진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소중한 이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정말 그런 마음이 든다. 내가 그들의 행복에 어떤 의무라도 있는 , 자꾸만 나서고 싶어 진다.


내게 사랑하는 일이란 건 그런 것 같다. 누군가의 행복을 함께 책임지는 일. 누군가가 행복하지 않을 때 그게 내 책임이라도 되는 양 나서고 싶어 지는 일. 난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책임을 점점 그득히 끌어안게 되면서도, 더욱 행복해진다. 사랑은 그런 게 가능하도록 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난 내가 가진 책임을 펼쳐 보여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책임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랑일 거라고. 내게 사랑하는 일은 그런 마음이라고 말해줄 거다. 행복을 책임지고 싶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충만해지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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