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프레보 악세
발은 멈추고 눈은 길을 잃고 귀는 뭔가를 찾는다. 무슨 음악인지 머릿속을 뒤져보고 그래도 모르면 잊지 않으려고 한참을 흥얼거린다. 요즘은 음악을 찾아주는 똑똑한 어플 덕분에 찾는 시간은 줄었지만, 사진 대신 캡처가 쌓여간다. 그렇게 쌓이는 음악 중에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르가 있다. 우연이 두 번이면 인연, 우연이 세 번이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처음 라디오에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곡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The Girl From Ipanema)>를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얼음이었다. 조용한 보컬 속에서 반복되는 묘한 기타 소리와 진한 색소폰 소리가 마음속에 아주 크게 울렸다. 그리고 엘리제테 카르도소(Elizete Cardoso)가 부른 <카니발의 아침(Manha de Carnaval)>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또, 마이클 프랭스(Michael Franks)의 안토니오 송(Antonio´s Song)은 어떤가. 조빔을 위한 곡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어떤 날의 <오래된 친구>,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에서 난 또 멈춰 섰다. 보사노바와 나는 필연이었다.
이후 그 리듬에 매료되어 스탄 게츠(Stan Getz)와 조앙 질베르토(Joao Gilberto)의 음반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특히 그 몽롱한 드럼 소리에 반해서 급기야 드럼 학원까지 찾아갔다. 스틱을 잡는 자세와 내리치는 것만 한 달이 넘게 가르쳐준 선생님 때문에 흥미를 잃을 뻔했지만, 고비를 넘기고 보사노바 리듬을 배운 후 얼마 안 되어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던 건지 대학 클럽 활동으로 드럼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선생님은 라틴리듬에 관심이 없었는지 보사노바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처음 목표 곡으로 러쉬의 <톰소여 Tom sawyer> 악보를 내줬을 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나는 굵은 스틱까지 샀고 귀에 꽂아준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맘에도 없는 연주를 해야 했다. 지금도 그 악보를 보면 어떻게 했는지 신기루 같다. 물론 매우 어설픈 연주였지만, 그래도 이걸 어떻게 따라갔던 건지...
보사노바(Bossanova)는 그 뜻 그대로 내게 매우 <새로운 장르>였다. 브라질 음악과 미국의 음악이 합쳐진 퓨전 음악인 보사노바는 삼바 리듬에서 나왔는데 재즈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 감미롭고 세련된 느낌이 가득하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카에타노 벨로주가 첫 내한을 했던 2016년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영상을 봤다. 국내에서는 그의 목소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의 삽입곡인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rucucu Paloma)>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원래 이 곡은 멕시코의 토마스 멘데스 소사(Tomas Mendez Sosa)가 만들고 멕시코 여가수가 가장 먼저 불렀지만, 수많은 버전 중 그의 목소리가 가장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카에타노 벨로주(Caetano Veloso)는 1942년 브라질의 바이아 주의 작은 도시, 산투 아마루 다 푸리피카상(Santo Amaro da Purificação)에서 태어났다.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가정주부였고 2명의 입양 형제를 포함해서 8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살았다. 집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아홉 살에 처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십 대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별히 조앙 질베르토의 보사노바 음반을 좋아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할 때 그의 곁에는 여동생인 마리아 베타니아(Maria Bethânia)가 있었다. 그녀 또한 브라질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이다. 그녀 외에도 누나인 마벨 벨로주(Mabel Velloso)도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 교육자이다. 이름으로 짐작하겠지만, 가수로 활동 중인 벨로 벨로주(Belô Velloso)와 조타 벨로주(Jota Velloso)도 다 집안사람들이다. 그가 대학에서 전공한 철학은 그의 예술적 표현과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를 좋아했다는데, 실존주의와 그의 음악, 정말 완벽한 고리가 아닌가.
1967년부터 그와 친구들은 새로운 브라질 팝 뮤직에 새로운 혼합을 시도한다. 전통 포크 리듬과 사이키델릭 록, 구체 음악, 시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가사를 합쳤다. 그리고 음악적 동지인 갈 코스타(Gal Costa)를 만나 <일요일(Domingo)>을 녹음한다. 당시 갈 코스타는 트로피칼리즈무(Tropicalismo)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1960년 시작된 이 운동은 브라질 전통 음악의 재평가 목적을 두고 있는데, 군부 독재 하의 어두운 정치적 상황에서 진보적인 문화 운동이었다. 그 둘은 이 운동을 하다가 3개월을 감옥에서 보냈고 결국 국외로 추방까지 당했다. 그의 음악에 관한 감각적인 지성과 전통의 폭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었고 세계적으로 존경받은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렇게 그에게 ‘브라질의 밥 딜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음악은 조화로운 언어로
괴로운 세상에 말을 걸어주며
외로움과 불만을 달래주죠.
이 세상 속에서 음악은
우리 마음속에 있던 생각과 감정을 찾아
그 안의 진실을 일깨워줘요.
(세이모어)
그런 그가 올해 새 앨범을 냈다. 젊은 클라리넷 연주자 이반 사께르도테(Ivan Sacerdote)와 함께한 듀오 앨범이다. 무엇보다 그 둘의 이름으로 나온 앨범 제목에서 거장의 겸손함과 열린 마음이 느껴졌다. 이미 발표했던 곡들을 재해석한 이 앨범을 들으면서 문득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가 떠올랐다. 내 무의식이 ‘조화’라는 단어를 끌어낸 것 같다. 기타리스트 주앙 질베르토와 섹소포니스트 스탄 게츠를 떠올리게 하는 그들의 만남은 완벽한 조화였다. 32세의 젊은 연주가와 78세의 거장이 함께하는 이 연주는 음악을 떠나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런 그들의 만남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운 앨범을 녹음 준비를 하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가수이자 작곡가인 메거리 로드(Magary Lord)가 그의 집에 클라리넷 연주가를 데리고 왔고, 모두가 그의 달콤한 연주에 반하고 말았다. 그들은 치코 부아르케(Chico Buarque)의 <미래 연인들(Futuros amantes)>를 함께 연주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망설임 없이 집주인의 노래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79년도에 발표한 <Trilhos urbanos>부터 97년의 <Voce nao gosta de mim>에 이르기까지.. 거장에 비하면 한없이 어린 음악가이지만, 그도 신인은 아니다. 바이아 연방 대학교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경력을 쌓은 후 유럽에서 재즈 시즌을 보냈다. 그는 주앙 지우베르투의 음반에 매료되어 브라질로 돌아와 가수 로사 파소스(Rosa Passos)의 음악에 참여했다. 그의 연주에 반한 카에타노는 바이아의 천재 기타리스트인 펠리페 구에데스(Felipe Guedes)와 함께 연주를 제안까지 한다. 이 음반의 몇 곡은 카를리뇨스 브라운(Carlinhos Brown)의 스튜디오에서, 나머지 절반은 뉴욕의 비보(Vevo)에서 하기로 한다. 수많은 노래 중 잊혔던 곡의 재해석으로 시작한 이 콜라보는 감동 그 자체이다. 우아하고 맑은 클라리넷 소리는 미니멈의 맥시멈 효과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나는 브라질의 대중적인 클라리넷에 관한 연구를 점점 더 풍부하게 하면서 국내외 다양한 예술가들과 대화하는 특권을 가졌다........이 정도 수준의 아티스트가 클라리넷 연주자에게 즉흥 연주를 제안한다는 것은 브라질 음악에는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이반 사께르도테)”
첫곡인 갈 코스타가 불렀던 <그 프레보 악세(Aquele frevo axe)>에 끌린다면 꼭 모든 곡을 다 들어보길 권한다. 프레보(Frevo)는 페르남부쿠의 전통 음악 및 춤 스타일로 포르투갈어로 ‘끓다’라는 뜻에서 왔다. 듣는 사람이나 댄서들에게 땅에서 끓는 듯한 느낌을 주는 열광적이고 활기차며 빠른 리듬은 카니발 축제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단어, 악세(Axé, 아쎄)는 바이아주의 전통 음악 스타일로 아프리카-카리브 음악을 합친 것이다. 요루바어(아프리카의 요루바족이 쓰는 언어)로 ‘영혼, 빛, 정신 또는 좋은 떨림’이라는 뜻으로, 영적인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브라질의 유명한 카니발 축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더는 함께하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여전히 노래 ‘그 플레보 악세’를 부르고 있는지 물어본다. 음악 속에서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k81fiNxeXY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다가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것처럼, 보사노바를 들을 때 나의 의식의 흐름은 폭포처럼 쏟아진다. 잊혔던 그 시간과 사람, 공간과 소리가 예상치 못하게 나를 치고 아무 말도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나른한 오후, 전화, 스틱, 창문, 시디, 오렌지색....이 음악은 내게 막혀버린 것 같은 ‘창조’라는 단어를 가끔 열어주는 문, 어깨를 다독이는 따뜻한 손과 같다. 그러니 또 나도 모르게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두들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