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가 펼쳐진다. 반도네온과 바이올린, 피아노, 전자기타, 콘트라베이스가 조화롭다. 악기에서 악기로 이어지는 기쁨과 환희가 가득한 항구의 봄(Primavera Porteña)이 문을 연다. 곧이어 습하고 더운 여름의 나른함과 열정이 번갈아 쏟아지는 항구의 여름(Verano Porteño)이 퍼진다. 끝없이 반복되던 리듬 사이를 바이올린이 파고든다. 그리고 화려한 생기와 헤어짐의 고통, 이제는 항구의 가을(Otoño Porteño)이 왔다. 그새 강렬한 여름 햇볕에 익숙해진 건지 가을은 차분하다 못해 우울하다. 색색으로 물든 거리와 짧아진 해가 겨울을 부른다. 항구의 겨울(Invierno Porteño)이다. 포근하지만 쓸쓸하게, 막 눈이 내리기 직전이다. 외로움과 우울은 리드미컬함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쥐락펴락하는 그 속에서는 온몸이 흔들리게 어지러워도 좋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의 겨울, 그리고 집집마다 켜진 불빛의 그 따스한 힘이 이 계절의 마지막을 위로한다.
그리고 이어서 장엄한 전주곡 9 (Preludio nueve)가 시작된다. 결국, 방문을 열고 아르헨티나 어느 항구로 향한다. 언제 반도네온을 만날까 기대에 부풀어 현을 따라간다. 드디어 반도네온 출격. 불협화음 같은 이 소리가 칩 십 년대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골목으로 데리고 간다. 다소곳하게 음악에 끌려가는 듯했지만, 멀리서 들리는 3001년을 위한 서곡(Preludio para el Año 3001)에 나도 모르게 다시 빨려 들어간다. “레나세레, 레나세레, 레나세레(renaceré, renaceré, renaceré)!” 3001년에 꼭 다시 태어날 거라고 말하는 비장함, 너무나 사랑했던 것들로부터 다시 태어나겠다고 말하는 진실함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이처럼 강렬한 오디오 연극이 있을까... 이제 좀 더 씩씩한 걸음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현의 소리를 들으며 비장한 각오를 다진다. 좁은 골목 어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훌리오 데 카로(Julio de Caro)가 나타난다. 땅고 작곡가이자 연주자, 지휘자였던 그를 위한 곡, 데카리시모(Decarísimo). 더블 베이스 땅고 연주자 엔리케 키초 디아스(Enrique Kicho Díaz)를 위한 키초(Kicho)가 이어진다. 여기에 첼로도 빠질 수 없다. 호세 브라가토(José Bragato)를 위한 브라가티시모(Bragatíssimo)로 거리가 북적인다. 그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도시를 밝힌다.
골목 한쪽 벽을 보니 색색의 묘한 상어(Escualo) 한 마리가 걸려있다. 에두아르도 코브라의 작품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즉흥적인 피아노 연주와 일정하게 반복되는 구간이 바늘에 걸려든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 좁은 길을 벗어나니 커다란 물줄기가 보인다. 헤밍웨이가 즐겼던 쿠바 낚시터만 한 곳에 꾼들이 줄을 대고 있다. 나는 그들 곁에 앉았지만, 하늘에 줄을 대고는 허공을 바라본다. 시간의 강박을 벗고 권태를 즐기는 시간이다. 그것도 잠시, 난데없이 하늘이 캄캄해진다. 환상적인 천사의 땅고(Tango del Ángel)가 시작된다. 천사의 등장(Introducción del Ángel)과 천사의 죽음(Muerte del Ángel), 특히, 천사의 죽음을 알리는 어둠에 다시 심장이 요동친다. 하늘 식구의 죽음은 달랐다. 그들은 재빨리 슬픔을 감출 줄 안다. 다른 천사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춤을 춘다. 그리고 천사의 밀롱가(Milonga del Ángel)에서 울리는 4분의 2박자가 느리게 들려온다. 순간, 영화 <탱고 레슨>의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렇게 늘 기억을 파헤친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난 그만 울음을 쏟는다. 늘 벌어지고 난 후에나 깨닫는 것, 느린 곳에서는 늘 울음이 터진다는 사실. 끝까지 나를 위로하거나 감춰줄 생각이 없는 피아노는 마지막까지 느리게 쏟아진다. 그리고 이어 부드럽게 현이 이어진다. 평소와 다른 이 느낌에 다시 한번 내 귀가 살아난다.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그림 아래에서의 화해처럼 나도 일어난다. 그리고 드디어 천사의 부활(Resurrección del Ángel)이 시작된다. 장엄한 부활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한 천사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렇게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며 살았을까…… 중간에 짧게 이어지는 피아노에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이 일어나 그 부활을 바라본다. 거리를 걷던 나는 하늘에 정신이 팔려 빛이 사라진 후에도 계속 고개를 든다.
다시 땅으로 눈을 돌리니 모든 게 뒤틀려있다, 레비라도(Revirado). 하늘로 향했던 눈은 원래도 뒤틀리고 미쳐버린 세상을 더 또렷이 바라본다. 피아노와 현의 한판, 전율이다. 박자를 조금이라도 놓치면 더 미쳐버릴 것 같은 이 곡은 그야말로 형용 못 할 앙상블을 자랑한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곡이 울려 퍼진다. 광인을 위한 발라드(Balada para un loco). 미친 곡, 오라시오 페레르(Horacio Ferrer)의 글과 아멜리타 발타르(Amelita Baltar) 연기력, 그리고 그것을 오롯이, 미친 듯이 누리는 여기 한 사람까지.
골목 여기저기에 이 소리에 홀린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하지만, 추운 바닥에서 몇 해를 보내본 나는 이제 조용히 그곳에서 빠져나올 줄 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깨우지 않는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놀라는 소리에 스스로 깨어나 아무렇지 않게 털고 일어날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린다. 부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가득 메운 땅고와 새벽의 비명이 영원히 끊이지 않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dF-IMQzd_Jo
피아졸라는 이름만 꺼내도 벌써 가슴이 벅차다. 그는 늘 시대를 앞서가고 새로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혁명적인 예술가였다. 내가 매우 흠모해 마지않는 예술가, 누에보 땅고(새로운 땅고) 시대를 연 그의 인터뷰 대답을 짧게 나누는 것으로 그에 관한 길고 긴 이야기를 대신한다. (trans by siemprendo)
"제가 파리에 갔을 때, 말 그대로 머리가 열렸어요. 저는 나디아 불랑제와 공부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확인했고, 게리 멀리건(색소폰 연주자)과 그의 밴드 음악을 들었어요. 그들의 음악을 듣고 완전히 미쳐버렸죠. 멀리건의 뛰어난 연주와 조정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무대에서 행복을 느꼈거든요.
이제까지 제가 들었던 장례식 행렬과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모임 같은 땅고 오케스트라와는 완전히 달랐죠. 그건 축제였고 즐거움이었어요. 색소폰을 불고, 드럼을 치고, 트롬본을 연주하고... 그 자체가 행복이었어요. 거기에서는 서로 간의 합의가 있었거든요. 감독이 있었지만, 음악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즉흥 연주와 흥겨움, 화려함도 있었어요. 저는 이것이 제가 바로 원했던 땅고였음을 알았죠.
그래서 실제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옥테토(Octeto, 8중주단)’를 만들었어요. 맞아요, 이건 정말 혁명 그 자체였어요. 거기에서 저는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와 나디아 불랑제에게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었어요. 물론 몇몇 연주와 악기 진행은 재즈적인 특징이 많았어요. 저는 땅고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인 스윙을 도입했죠. 기본적으로는 대위법에 관한 생각이었어요. 옥테토에서 연주하는 것은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것과 같았죠. 각자 자기 파트가 있으면서, 다른 이들의 파트와 대화하는 거였어요. 각자 연주를 즐길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각자 자기가 만든 음악을 자랑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거죠. 이것이 가장 중요해요. 음악이 재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물론, 거기에는 제가 수업에서 배운 모든 것이 들어있었어요. 특히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톡, 라벨, 프로코피예프에 대한 모든 것들이요. 아르헨티나 땅고 뮤지션인 오스발도 푸글리에세보다 더 격렬했고, 아니발 트로일로의 세련미도 있었죠.... "
[아르헨티나 시인. 기예르모 사베드라(Guillermo Saavedra)와 인터뷰 중(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