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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모 Oct 25. 2024

25도의 사랑

뜨거웠던 적이 있던가 우리


여름철 실내 적정 온도 25도란, 참 애매하다.



"적정"하다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누군가는 덥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춥다고 한다. 

하지만 더운 쪽이든 추운 쪽이든 꽤 참을만한 온도이다. 아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애매함은 모두를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지만 거꾸로 모두의 의견을 절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미적지근한 온도 덕에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기억이 제각각이다.



내 사랑들은 늘 그런 25도 같았다.



90년대생인 나의 문화자본을 키워준 8할은 본방송을 사수해야만 했던 드라마와 영화, 예능, 그리고 뮤직비디오들이다. 그 당시 모든 컨텐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랑"이었다.


그야말로 사랑만능주의였다. 사랑때문에 울고 불고 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은 낭만이었다. 삼식이는 삼순이에게 커다란 돼지 인형을 안겨주었고, 지후선배는 잔디를 위해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다.


모든 드라마를 과몰입하며 보고 다음 날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건 팍팍한 학창시절의 큰 낙이었다. 매년(혹은 더 자주)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고 드라마 주인공에 내 상황을 대입하기도 했다. 절친과 좋아하는 사람이 겹쳐 질투 아닌 질투를 하기도 했다.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커다란 이벤트는 없었지만, 늘 사랑에 대한 촉각은 곤두세우고 지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크나 큰 환상을 품은 채로 어른이 되었다.



막상 내 앞에 맞닥뜨린 사랑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운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리 절절하거나 애틋하지 않았다. 파트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드라마만큼 큰 이벤트가 늘 터지는 것도 아니었다. 

흔한 연애가 그러하듯 사랑을 시작할 때의 간지러움, 서로에게 잘보이기 위해 조금씩 꾸며내는 귀여운 거짓말, 사소한 말다툼은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사랑의 모습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평온했고 별일 없이 잘 흘러갔다.

그렇게 드라마와 현실은 다름을 깨우치면서 사랑에 대한 환상을 조금씩 벗겨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친구들의 사랑이었다.


하루가 48시간인 것 처럼 사랑하는 I, 한여름 아이스음료의 토핑이 녹아내릴까봐 뛰어서 챙겨다주는 N, 분기마다 파트너가 바뀌는 P, 아침/점심/저녁으로 소개팅을 하는 H, 매일이 내전중이지만 집에는 꼭 같이 가는 S, 대로변에서 싸우다가 주민신고를 받은 U까지.



뜨겁다못해 끓어넘치는 그들의 사랑들을 보고 있으면 내 사랑은 꼭 다 식은 아메리카노 같았다.



애정은 분명하지만 사랑인지는 모르겠고, 설레이는 날도 있지만 무덤덤한 날이 더 많았다. 큰 다툼이나 충돌없이 그냥저냥 흘러가는 미적지근한 사랑이었다. 

전쟁같은 사랑을 하는 이들은 이런 나의 연애를 "평온하고 안정감있는" 연애라 평하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이 평가에 좋아해야 하는지 의아했다. 내가 원하는 건 소위 말하는 고자극의 스릴있는 연애였으니 말이다.



마음이 이러하니 숱한 이별을 맞닥뜨릴 수 밖에.



나의 우선순위에 상대가 없어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해서, 없던 텐션을 끌어올리다가 지쳐서, 느슨해진 관계에 긴장감을 조성하려다가 오히려 대치상태가 되어서, 별 일 아닌 일로 싸움을 걸다가, 수시로 마음을 확인받고 싶어하다가 등등 이유는 다양하다. 주로 원인을 제공한 건 나다.


사랑조차도 성실하게 내가 원하는 모양새로 리모델링하려다가 망쳐버린 셈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게 표현이 모자라고 이 관계에 진심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실패가 쌓이니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줄었다. 어차피 미적지근한 관계를 이어나갈거라면 애초에 시작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지나간 실패를 곱씹어보며 패인을 분석하고 싶진 않았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만남이 생겼다.

기대치가 0에 수렴하는 만남인지라 되도 않는 '척'을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릴 필요도, 싫어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수시로 체크해야 하는 마음같은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사람과 n년째 사랑을 하고 있다. 지금의 사랑 역시 심심하다. 딱 실내적정온도 25도처럼 그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크게 좋거나 흥분하는 일은 없으며 늘 설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쉽게 흔들릴거라는 불안감도 적다.



지난 사랑들과 지금의 사랑이 다른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온도다. 온도가 맞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사랑을, 관계를 대하는 온도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니 뜨겁지 않은 내 사랑은 더 이상 흠이 아니었다. 애초에 쉽게 들뜨거나 흥분하지 않는 내가 친구들처럼 불같은 사랑을 하는 건 뜨거운 아아를 달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이다. 그 당연한 것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랑이라 누군가가 데이거나 시려울 일도 없다.


그 미지근함 덕에 같은 공기 안에서 지치지 않고 더 많은 기억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랑도 언젠가는 끝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알게 된 건 심심한 애정도 사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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