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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Sep 23. 2019

직장을 오래 다녀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은퇴할 때쯤 익숙해지려나

직장생활을 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익숙지 않은 일들이 많다. 보통은 평소에 잘하지 않는 일들이다. 어쩌다 한 번씩 하다 보니 방법도 잊어버리고 다시 하려면 어색하다. 직장생활을 오래 해도 좀처럼 익숙지 않은 일들에 대해 나열해 본다.



1. 지출결의서 올리기

주로 사무실에만 있는 개발자이다 보니 지출결의서 올릴 일이 많지 않다. 가끔 올릴라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문서 폼은 왜 그리 자주 바뀌는지. 기억나는 대로 해서 올리면 방식이 바뀌었다고 퇴짜 맞곤 한다.



2. 연봉협상

직장 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연봉 협상은 익숙지 않다. 협상 전에는 임전무퇴의 각오로 배수진을 치겠다는 입장, 거란군을 말발로 물리친 서희 장군의 기개로 무장해 보지만 막상 들어가면 '예, 예, 예'만 하다 나온다. 머릿속의 다양했던 시나리오는 어쩜 그렇게 쉽게 초기화되는지 모르겠다.



3. 팩스 전송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서 전송만 하면 되는 매우 간편한 시스템을 두고 굳이 팩스를 요구하는 데가 있다. 팩스는 어떻게 보냈지? 회사에서는 온라인 팩스를 쓰는 데 사용법을 물어물어 보내고 나면 제대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사진으로 받으면 안 되겠니?



4. git

요즘 git(소스코드 관리 툴)을 안 쓰면 개발자로 보지도 않는 추세다. 우리 회사도 올해부터 전사로 git을 사용한다. 다른 개발자들은 git을 찬양하며 쓰는데 난 쓰고는 있지만 도통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에러도 잘나고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쓰기가 조심스럽고 에러라도 나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후배한테 이거 왜 안되냐고 자꾸 물어봐서 미안해 죽겠다. 



5. 냉온수기 생수통 교체

젊을 때는 무거운 생수통 한 손으로 번쩍 들어서 갈고 그랬다. 이젠 나이가 있는지라 교체를 하려면 허리 나갈걸 생각해야 한다. 보통은 생수통이 비었으면 조용히 다른 곳에서 물 받아온다.



6. 진급 - 본인, 타인

내가 진급하면 직급이 바뀌어 불리는 게 그렇게 어색할 수 없다. 내색은 안 하지만 무언가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나 같은 사람도 진급을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진급한 타인을 해당 직급에 맞게 불러주는 것도 이상하게 어색하다. 한 달 정도는 입에 잘 안 붙는다. 진급은 직장 생활을 통틀어 몇 번 안 일어나는 일이라 더욱 그런 듯싶다.



7. 휴가, 연차, 반차

휴가나 연차 또는 반차를 쓰겠다고 얘기하는 것만큼 익숙지 않은 일이 없다. 항상 얘기할 때는 언제 쓰겠다고 당당하게 얘기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거부당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자리 잡고 있다. 쉬는걸 마뜩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직장 문화의 문제라고 본다.



8. 외근

간혹 다른 업체로 외근을 가곤 한다. 갈 때마다 약간의 긴장이 된다.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갈 때는 말수가 부쩍 줄어들고 끝나고 나오면 말이 부쩍 많아진다.



9. 윈도우 포맷

윈도우라는 녀석은 몇 년에 한 번은 포맷을 해줘야 한다. 윈 10까지 오면서 그래도 안정된 듯 보이지만 국내 웹 환경하에서는 포맷이 필수다. IT업종 종사자지만 몇 년에 한 번 하는 포맷은 항상 복잡하다. 데이터를 백업받고 포맷을 하고 다시 필요한 것들을 설치하고 나면 반나절은 후딱 지나간다. 업무에 필요한 세팅을 하다 보면 하루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10. 성과보고서

회사에서 반년에 한 번씩 성과보고서를 제출한다. 반년 간 내가 이룬 성과에 대해서 적어내고 평가를 받는 것인데 회사 열심히 다녔어도 딱히 쓸게 없다. 내가 하던 업무 계속 해왔는데 성과랄게 특별히 있기가 힘들다. 영업 직군처럼 뭘 따내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반년마다 창의적이고 대대적인 사업을 벌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성과보고서를 쓰다 보면 매년 내용이 비슷하고 문장만 조금씩 달라진다. 성과보고서 쓰는 일에 익숙해졌다는 얘기는 작년과 같은 문장을 조금만 변형해 써서 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11. 퇴사자

퇴사자가 발생하면 마음이 마음이 착잡하다. 떠난 자리는 커 보이게 마련이고 업무 인수인계도 받아야 하고 퇴사자가 여기보다 더 좋은 회사로 가기라도 한다면 부러움에 괴롭기도 하다. 거기다 친했던 사람이라면 허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떠나는 사람은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들떠있어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럼 참 야속하다. 직장 생활에 영원한 건 없어서 회사를 다니는 동안 무수히 많은 퇴사자를 만나겠지만 아무리 오래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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