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에도 도둑이 있을까? CCTV로 범벅이 된 세상에서 완전범죄를 꿈꾸는 도둑질이 가능하기는 할까? 한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무언가를 훔치고도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나가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런 대도들이 지금 현재의 세상에 존재하 수 있을것인가 하고. 그러나, 요즘은 조금 다른 형태의 도둑들이 넘쳐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사유재산이나 소유물을 빼앗은 게 도둑이라는 점에서 사실 도둑의 주된 행위는 훔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가를 훔치는 행위에 대해서 이전부터 잘못된 사회적 행동이라 꾸준히 배워왔지만 최근들어 누군가의 무언가를 훔치는 걸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느 사람들이 꽤나 있는 것 같다.
※ 경고! 20XX년 12월 12일 14:32분 경 계산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가져가시 분들 알아서 와서 결제하시기 바랍니다. 민사소송 준비 중임을 알립니다.
최근 무인가게 아이스크림 종종 붙어있는 한 장의 종이페이지에 유사한 글을 꽤나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훔치면서 자신의 얼굴이 까발려지는 데에 대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가도 뭔가 원피스의 현상금수배서 같은 느낌도 났다.
[ 만화 '원피스' ]
“루피의 현상금이 30억베리야!”
“이럴수가!”
만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사람들이 현상금 수배서에 올라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도둑질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해적 만화를 보면서 내 얼굴 아래 500원짜리 현상수배서가 달리면 뭔가 좀 착잡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50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왜 훔친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범죄의 경중을 따지는 데 그 규모보다 의도 자체에 목적을 두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차라리 500원짜리 도둑들의 소식을 듣는 건 조금 다행이지 않을까싶다.
“최근 전세사기로 유명했던 한 일가가...”
“루나 사태로 유명했던 권도형이...”
영화나 만화에서 보이는 도둑들과 달리 최근에 보이는 도둑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더 많이 훔치는 것 같다. 아라비아로 숫자로 나열된 디지털 세계의 가상화폐들과 뱅킹에 찍혀있는 보유잔액들. 그리고, 계약서를 신용의 증서가 아닌 물체 그 자체인 종이 쪼가리로 치부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패악질들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수법이 저열해서 그런지 영화나 만화에서나 보이는 악역들의 낭만이라고는 전혀보이지 않는다.
[ 영화 '도둑들' ]
“우리는 도둑이야. 도둑은 도둑답게 살아야지.”
어리석은 문장처럼 보이지만 영화 ‘도둑들’에서는 도둑이라는 범죄자에 대한 긍지를 보여주는 대사들이 몇 있었다.
“도둑들이 왜 가난한 줄 아니? 비싼 걸 훔쳐서 싸게 팔거든.”
당시에는 그냥 영화적인 요소로 배우들이 내뱉는 대사들을 멋있게만 생각했었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비싼 걸 훔쳐서 싸게 판다.
“야! 누가 등 떠밀어서 투자하랬냐? 그거 어차피 다 네가 일확천금 벌고 싶어서 투자한 거 아니야? 그리고 뭐 내가 억지로 시켰어? 네가 우리 사업 아이템 좋다며?”
이런저런 투자 사기에 휘말린 피해자들에게 사기꾼들이 많이 하는 대사다. 수조원대의 사기를 친 조희팔이라는 사기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었지만 현실이라는 냉혹함은 영화라는 뜨거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대략 2조원대의 사기를 치지만 현실에서 조희팔은 약 7만명의 사람에게 5조원의 사기를 쳤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인거지.
[ 영화 '마스터' ]
그럼에도 사기꾼이라는 도둑놈들 주위를 떠도는 인간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등떠밀었냐? 네가 선택한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선택의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니까. 그러나, 그런 사기꾼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을 보면 단순히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도둑맞은 것은 어떻게 보면 꿈과 신용인 것 같다.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믿을만한 친구고 둘도 없는 친구라는 이유로 돈을 빌려준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원치 않는 돈을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순수한 피해자들의 경우에서만 말이겠지만.
“야. 다들 힘들어.”
그렇게 남들의 등에 칼을 꼽는 도둑놈들 중에서는 자신도 피해자라고 떠벌리는 인간들이 꽤나 있다.
[ 시리즈 '오징어게임' 中 한 장면 ]
“진짜 저희가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다음달에 계약금을 주면 안될까요?”
“사장님. 정말 저 너무 힘든데 혹시 가불 좀 할 수 있을까요?”
을의 노동력을 도둑질하는 갑과 갑의 돈을 도둑질하는 을들이 넘쳐나는 세상. 업무 시간에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노동자도 도둑이고 열심히 일한 을에게 제대로 된 돈을 주지 않는 갑도 도둑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잠재적 도둑일 수 있다. 누군가의 진심을 배신하거나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훔친 도둑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큰 도둑은 아마 유튜브가 아닐까 싶다. 이제 좀 줄이긴 해야하는데 어릴 적 바보 상자 앞에 앉아 세상을 보다 이제 더 작은 바보상자에 얼굴을 박고 세상을 보다 보니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세상을 향한 창이 된 것 같은데... 도둑질 좀 살살 당해야겠다. 이제.... 그럴 수 있을까?
근데 유튜브는 내돈 내고 내가 가는 건데 왜 이렇게 고민을 하고 절제를 해야하는 거지? 이게 소비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 호소인의 외침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