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션
“오빠! 오빠!”
“보고 싶었어.”
어젯밤에 꿈에서 그녀를 보고,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품 안에 들어온 민영이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음에도 보고 싶은 느낌이었다. 안겨있는 민영이의 체온과 향,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감촉은 나를 금방 뜨겁게 만들었다. 그 어떤 감미로운 말로도 사랑을 형언할 수 없기에 섹스라는 충동이 강렬한 듯했다. 단순히 번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최상위 표현과 방법이 섹스라는 듯 우리는 멈추지 않고 서로를 느꼈다. 끊임없이 서로의 몸을 탐했고, 그 시간이 영원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또다시 저 멀리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밝은 빛은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우리에게,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내 몸에 안겨있던 민영이는 회색빛 베개로 바뀌어 있었고, 다시 한번 나에게 그녀가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로션통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잠들어야 해. 빨리 잠들어야 해.”
다시 서랍 위에 있는 수면유도제를 먹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한 번 달아난 잠은 쉽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피곤함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든 탓인지, 사우나를 하고 난 듯 개운했다. 잠이 아예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수면 유도제를 두 세알 정도 더 삼켰다. 그러나, 걱정으로 가득 차버린 탓에 눈은 더 말똥말똥해졌다. 어떻게 하면 잠이 더 잘 올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부엌을 향했다. 포만감과 취기를 빌려서 잠이 들기 위해, 라면 2 봉지와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들어온 라면과 소주, 그리고 조금 전 먹었던 수면 유도제가 속에서 소용돌이치더니 결국에 미친듯한 졸음이 눈꺼풀을 밑으로 끌어당겼다. 기절할 것 같다는 느낌에 재빨리 침대로 돌아가 로션을 꾹 자서 얼굴에 펴 발랐다.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블랙아웃이 온 듯 세상이 검게 변했다.
“오빠. 괜찮아?”
“어...민영아.”
“오빠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여기 쓰러진 채로 돌아왔어.”
“괜찮아. 아까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지?”
“아니야. 괜찮아. 근데, 오빠. 우리 얼마나 더 볼 수 있는 거야?”
“민영아...”
“솔직하게 얘기해 줘. 이렇게 오빠를 붙잡고 있을 수 없잖아.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지.”
“뭘 준비해? 우리 이렇게 그냥 서로 같이 있는 것만 생각하자. 지금이 중요하잖아.”
“그래도 우리 이제 인정해야 하잖아. 난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나도 알고 있다고.”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런 말 하지 마.”
“오빠...”
“우리 평생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떻게?”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볼게.”
이제 곧 사라질 미래를 걱정하는 민영이를 보고, 민영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짧은 꿈 속에서 느낀 민영이의 숨결, 손길, 포옹, 키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살냄새....이 모든 것이 내가 사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민영이를 위해서 이기적이었던 나 자신을 희생하기를 마음먹었다.
“오빠...이제 가야겠네.”
“곧 다시 올게.”
“알았어....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걱정 마.”
언제나처럼, 빛이 스멀스멀 들어오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민영이와의 시간을 선택한 나의 이야기와 현실에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 내 삶에 대한 짧은 회고록과 편지들을 써 내려갔다. 세상과의 이별에 대한 마무리가 끝나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용기를 얻기 위해, 입 속에 깡소주를 털어 넣으며 욕조에 물을 받았다. 몸이 다 잠기게 물을 받은 뒤,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수면유도제를 한 주먹 집어서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보이는 민영이를 모두 짜내 얼굴과 몸에 덕지덕지 칠했다.
붉은 빛깔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욕조 안에 누워서 온몸에 힘을 뺀 채, 민영이를 만나러 갈 준비를 마쳤다.
“오빠. 오늘은 뭐 했어? 목욕하고 있네.”
“어..조금 더 깨끗한 모습으로 널 만나고 싶어서.”
“괜찮아?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곧 만날 거야. 우리 이제.”
“오빠. 언제쯤 와? 나도 준비 좀 하게.”
“나..이제..곧..”
“지금?”
“지..”
약을 많이 먹어서였을까?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워터파크 슬라이드를 타듯 미끄러지며 꿈속으로 들어갔다. 민영이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이제부터 영원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박동소리가 온몸에 울려 퍼졌다.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울컥하는 마음에 순간 울대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민...민영아.”
“....”
“민영아?”
소파에 앉아있는 민영이의 무릎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머리를 베고 있었다.
“너 누구야!”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자,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민영이의 머리채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투명한 유리벽에 막힌 듯 잡히지 않았다. 손길뿐 아니라, 내 모든 것이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정체 모를 벽에 막혀,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미친놈은 잘 해결됐어?”
“저번에 체포해서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고 들었는데. 몰라. 그런 미친놈 어디 한둘인가? 싹 다 자지를 잘라서 깜빵에 넣어버려야 해.”
“크크크. 더러운 새끼들.”
“오빠 자지가 제일 더럽지 않아?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니잖아?”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도, 네가 제일이더라.”
“양아치새끼.”
“양아치가 좋다며?”
“병신보다야 좋지.”
내가 알던 민영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날라리 같아 보이는 자식과 몸을 섞는 그녀를 보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탓인가. 또다시 눈앞이 새하얘지며,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삐이이, 삐이이.-
“선생님. 2500번 박노선 환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2500번! 2500번! 정신이 들어요?”
노선이 핼쑥해진 얼굴로 새하얀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손발이 묶여있다.
“여기가 어디예요? 민영이는요? 우리 민영이는요?”
“2500번! 여기가 어딘지 기억나요?”
“무슨 소리예요? 여기가 어딘데요? 이거 풀어줘요. 빨리. 이거 풀라고! 이거 풀어! 이거 풀라고! 이 씨발새끼야!”
“하아... 김간호사. 진정제 좀 주세요.”
“이거 풀으라고! 이거 풀어! 민영이 어디 있어? 이 씨발년 어디 있어!”
의자에 묶인 채, 난동을 부리는 노선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이 의사가 노선의 몸에 이어진 링거에 주삿바늘을 꽂는다. 갓 잡아 올린 고등어처럼 온몸을 팔딱거리던 노선의 손등으로 진정제가 흘러들어 가자, 뭍에 나온 물고기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듯 고개를 떨어트린다. 노선이 완전히 잠에 빠지자, 의사와 간호사가 노선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와 하얀색 세라믹으로 사방이 빛나고 있는 병동으로 향한다. 병동에 들어가 다시 잠을 자는 노선을 보며, 의사와 간호사가 한숨을 쉬며 한탄스러운 한숨을 내뱉는다.
“이번에 거의 다 왔었는데, 또 실패네요.”
“그러게. 진짜. 힘들게 하네. 저런 것들 그냥 사형시켜야 하는데, 뭔 놈의 정신치료를 한다고.”
“저 사람이 그 배우 김민영 스토커죠?”
“어. 맞아. 음식배달원으로 변장하고 집까지 찾아갔잖아. 그래서, 김민영 남자친구 있는 거 다 알려지고.”
“저도 그 뉴스는 봤어요. 스토커보다 그 회사 실장이랑 비밀연애 걸린 게 더 유명했잖아요.”
“그러니까. 로션통에 사진 프린팅한 게 이렇게까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 그 노래 틀어주고. 저거 틀어주면 좀 얌전해지더라.”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로 보이는 여자가 하얀색 세라믹으로 도배된 방에 있는 새까만 스피커에 손을 가져다 대자 방안에 노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Why do birds suddenly appear every time you are near.
당신이 근처에 있을 때마다 왜 새들이 갑자기 나타나죠
Just like me, they long to be close to you.
마치 저처럼 그들도 당신의 곁이 간절한가 봐요.
Why do stars fall down from the sky every time you walk by
당신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왜 별들이 쏟아질까요?
Just like me, they long to be close to you
마치 저처럼 그들도 당신의 곁이 간절한가 봐요.
- Close to you [ 올리비아 왕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