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센스
“하아..”
민영이를 더 이상 못 보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나, 맥주캔과 소주병이 널브러져 있는 차박 트렁크를 보자, 내가 현실이 아닌 꿈에서 허우적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션 향을 맡으며 민영이를 다시 보게 된 건 딱 하루. 그 하루 만에 투명한 로션 통을 가득 채웠던 로션은 절반만 남아있었다. 그녀가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나서, 그 누구보다 민영이를 생각하고 위했다고 했다. 그러나, 난 민영이를 보고 싶다는 욕심에 하루도 안돼서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 중 반을 써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오빠는 지금 그 잘잘못 따지고 싶어?”
“내가 언제 잘잘못 따지자고 했어?”
“그럼 왜 그러는데? 도대체? 내가 오빠랑 더 잘해보려고, 더 잘 지내려고 얘기하는 거 모르겠어? 내가 지금 아무 이유 없이 짜증 내는 것처럼 보여?”
“이게 지금 잘 지내보자고 하는 사람 태도야? 그냥 너 기분 나빠서 이러는 거잖아”
“나쁜 새끼.. 이기적인 새끼!”
난 민영이와 싸우기만 할 때면 항상 이기적인 놈이 되어있었다.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냐고 울먹이던 그녀가 그때는 모든 일에 감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쓸데없이 이성을 밀어붙였다. 민영이의 언성이 높아지면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에 급급했었다. 그때는 민영이가 나에게 섭섭해했던 감정보다 내가 민영이에게 답답해했던 감정이 더 중요했었다.
‘내 말이 어려운가? 왜 이해를 못 하지? 나와 관련된 모든 일들에 저렇게 감정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저렇게 말하면 나도 뻔히 기분 나쁘다는 걸 모를 리 없는데? 나도 피곤하고, 나도 힘이 들 때가 있는데, 내가 왜 항상 이해해줘야 하는 거지?’
싸울 때마다 매번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는 상황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익숙해진 내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투닥거리면서도 함께 지내왔던 그 시간들도 화창했었다. 그런 화창한 날들은 덥다고 생각했고, 시원한 바람만이 우리를 즐겁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것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그리고, 민영이가 나에게 바랬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어.’
하루 만에 반이나 사라진 민영이를 보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 싶었지만, 민영이가 한 번 눈앞에 나타나면 그녀의 모습을 계속 보기 위해 로션을 쉬지 않고 짜낼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내일을 위해 오늘은 그만 쉬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떠나보낼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민영이를 짜내기 전에, 민영이가 내게 선물해 준 향과 같은 로션이나 혹은 유사한 제품을 찾아야만 했다. 푸르르고 아름다운 바다를 뒤로 하고, 인근에 가까운 화장품점을 찾아갔다. 강릉에 있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화장품점과 백화점 등 수많은 뷰티스토어를 돌아다니며, 민영이와 같은 제품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한 시간을 넘게 돌아다녔지만, 민영이와 같은 로션은 끝내 찾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내 단잠을 깨우던 태양은 어느새 정수리 위에서 머리가 따가울 정도로 강하게 햇빛을 내리비쳤다.
『폐점정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전 제품 50% 세일!』
무더운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핀 신기루를 본 것 같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아스팔트를 넘어 뷰티스토어라기에는 너무나 너저분해 보이는 한 단촐한 매장이 들어섰다. 잡다한 제품들이 누리끼리한 바스켓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곳곳에 먼지가 끼어있고, 허름한 간판과 현수막도 하나 없이 현수막 뒤편에 매직으로 대충 글을 적어놓은 숨이 다해가는 폐점가게. 가게는 반짝거릴 정도로 광이 나는 하얀색 세라믹 타일로 꽉 차있었다. 없는 건 없지만, 살 것도 없는 제품들이 박스에서 곧 폐기될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 갔었던 뷰티스토어들과는 달리, 손님은 신경도 쓰지 않는 가게 주인아주머니는 핸드폰만 계속 두들기고 있었다.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혹시나 민영이와 같은 녀석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한 10분쯤 매장을 돌아다니다, 구석 어딘가에서 민영이와 같은 제품을 찾았다. 매장의 끄트머리 한구석에 먼지가 쌓인 박스에서 크기도 모양도, 그리고 색깔마저도 똑같이 생긴 로션을 보자 민영이를 처음 봤을 때 그 설렘이 느껴졌다.
“아주머니. 이거 계산해 주세요.”
“네.. 잠시만요.”
민영이랑 똑 닮은, 아니 똑같은 제품을 손에 넣고 신이 나서 다시 차를 향해 뛰어갔다. 물론, 가슴 한편에 설렘과 비례할 정도로 걱정이 가득했다. 혹여나,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난 민영이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더 늘려야만 했다. 차에 타자마자, 민영이를 짜 얼굴에 발랐다. 민영이의 향이 차 안에 퍼지자마자, 그녀의 음성이 바로 내 귀를 간지럽혔다.
“오빠. 지금 일어났어?”
“어.. 잠시만.”
“오빠. 지금 뭐 해?”
“어.. 아니야. 잠깐만.”
민영이와 똑같이 생긴 로션통을 꺼내 로션을 손에 묻혔다.
“오빠! 미쳤어? 오빠. 뭐 하는 거야?”
“어? 왜?”
“아니, 오빠는 나를 놔두고 지금 다른 년을 데려와? 미쳤어?”
“다른 년이라니?”
민영이가 내게 준 로션통이 뚜껑을 딱딱거리며 성질을 부리자, 방금 내가 손에 부은 다른 로션통이 오랜 잠에서 깬 듯 목소리로 뚜껑을 움직였다.
“괜.. 찮.. 아.. 요?”
민영이와 다르게 통신이 불안정한 핸드폰에서 지지직거리는 듯 한 목소리가 로션통에서 흘러나왔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니야. 오빠는 민영이랑 어떻게 하면 더 오랜 시간을 같이 있을 수 있을까 해서 방법을 찾느라...”
다시 한번 끊기는 듯 한 목소리가 나와 민영이의 대화에 껴들었다.
“정..신..이..조..금..들..어..요?”
느닷없이 대화에 끼어드는 로션통에 민영이가 화난 고양이처럼 하악거리며 살기를 뿜어냈다.
“저기요. 저 지금 오빠랑 얘기해야 하니까 죄송하지만 조금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아...네. 전 다시 잘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해세요”
“뭐야? 진짜. 진짜 재수 없네.”
아직 꽉 차 있는 로션통은 금세 입을 닫고 잠에 든 듯 더 이상 뚜껑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빠! 일단 쟤부터 손에서 놔!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미안해.”
딱딱거리며 소리치는 민영이의 호통에 반대손에 있는 로션통을 바로 뒷좌석에 던져버렸다. 미세한 표정은 알 수 없는 플라스틱 로션통이지만, 민영이가 화가 났다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민영이와 함께하면서 나는 목소리만으로도 그녀의 기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오빠. 진짜 뭐야?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어?”
“민영아. 진짜 난 다른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너랑 오래 볼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저걸 산 거야. 같은 향이 나면 너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지속될 수 있을까 하고...”
“오빠. 여전하네.”
“어?”
“그냥 똑같이 생기면, 내가 오빠한테 준 로션이랑 길거리에서 돈 주고 산 로션이 같은 게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너를... 너를 더 못 볼 것 같으니까...”
이제 민영이와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내 입으로 전달하자,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으려 애썼지만, 한 번 폭발해 버린 눈물은 댐에서 방류되는 물처럼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민영이의 목소리에도 훌쩍이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오빠..나도 오빠가 좋은 뜻으로 그런 거 알아. 근데, 근데..나도..겁 난단 말이야.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도 믿기지 않아. 이런 모습으로 오빠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어. 나도 원래 내 모습으로 오빠 보고 싶어. 오빠 꿈에서 만나고 싶어. ”
“그래. 민영아. 우리 꿈에서 만나자. 다시 집으로 가자.”
꿈에서 보자고 하는 민영이의 말에 그녀를 더 오랫동안 볼 수 있는 방법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민영이를 품에 안고, 바로 다시 서울을 향해 달려갔다. 어쩌면, 신이 우리에게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꿈으로써 알려준 것 아닐까? 그녀가 보고 싶어 하던 아름다운 바다가 일탈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휴양지라면, 집은 민영이와 평생을 보내고 싶어 했던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강릉에서 출발해 서울에 있는 집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달려왔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집 앞 약국에서 수면유도제를 구매했다. 운전을 오랫동안 한 탓인지, 아니면 어제 술을 좀 먹어서였는지 온몸이 피곤하고 땡땡 부은 느낌이었다. 민영이를 만나기 전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바로 수면유도제를 먹고, 반 밖에 남지 않은 민영이를 조금 짜내 얼굴에 바른 뒤 침대에 누웠다.
“오빠. 괜찮아? 집 잘 도착했어.”
“어. 방금 씻고 와서 누웠어.”
“피곤하겠네?”
“피곤하지. 이제 곧 잠에 들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졸린가 보네. 이제 편히 자...”
민영이의 목소리가 점점 더 희미해지며, 무겁고 간질거리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앞이 검게 변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익숙한 민영이의 모습과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