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로션

토너

by 심색필 SSF

-딸깍.-


“오..”


-딸깍.-


“빠!”


로션 통 뚜껑을 딸깍거릴 때, 나오는 민영이의 살냄새와 함께 민영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션뚜껑을 열고 코를 들이밀었다. 순간, 저 멀리 확성기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듯 민영이의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왔다.


“오빠! 로션을 발라!”


Firefly_A Korean man in his late 20s is looking in the mirror and applying lotion to his face 356578.jpg


메시아의 목소리는 분명 이렇게 들릴 것이다. 로션을 얼굴에 펴 바르자, 다시 로션통이 움직이며 민영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들려?”

“어. 다시 들려.”

“로션을 발라야지 오빠랑 나랑 연결될 수 있는 것 같아.”


로션의 향이 사라질수록 민영이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듯했다. 200ml의 로션. 이 조그만 통 안에 남아있는 로션이 나와 민영이를 이어주었다. 로션을 바르고 민영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대략 1시간. 이 1시간이 내가 그녀를 선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1회 한도였다. 순간적으로 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로 그리워만 하다 아무것도 못하고 이별하는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민영아. 나랑 가보고 싶은데 있었어?”

“왜?”

“지금 가려고. 너랑 가고 싶은 곳 다 갈 거야. 이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

“어...나 바다가 보고 싶어. 파란색 물이 비치는 바다를 가보고 싶어.”

“알았어. 바다 가자. 잠시만.”

“지금?”


Firefly_There is a bottle of lotion on the passenger seat of the car. 761762.jpg


민영이를 한 손으로 감싸 쥐고, 방에서 간단한 짐만 챙기고 바로 차로 향했다. 셔츠 가슴팍에 로션을 집어넣고, 덜컹거리는 중형 SUV에 몸을 실었다. 민영이가 항상 차지하던 조수석에 가방을 놓고, 민영이를 셔츠 가슴팍에 넣어놨다. 괜찮을 줄 알았지만, 민영이 대신에 자리를 차지한 가방은 나를 더 울컥하게 했다.


“오빠? 괜찮아?”

“어..어 괜찮아.”

“오빠. 나 좀 무서워. 그날이 자꾸 떠올라.”

“걱정 마. 그냥 나만 보고 있어. 나만 보고 있다가 잠들면, 바다 앞에 딱 모셔줄게.”

“오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얼굴도 너무 피곤해 보여. 잠은 잘 잔 거야?”

“괜찮아. 나는 괜찮아.”

“졸지 마. 내가 노래라도 불러줄까?”

“노래?”

“오빠 좋아하는 노래 있잖아.”


왼쪽 가슴팍에서 민영이가 뚜껑을 딱딱거리며 올리비아 왕의 ‘close to you’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이 노래만 들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민영이랑 드라이브할 때면, 항상 듣는 노래였다. 아무리 바빠도, 한 번씩 주말에 시간을 내 여행을 갔었다. 봄바람이 살랑일 때, 뜨거운 태양을 피해 바다로 놀러 갈 때, 그리고 푸르렀던 산이 점점 알록달록 물들며 바람이 선선해질 때,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을 때. 우리는 이 차에서 수많은 추억을 함께했다. 우리는 아무도 없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드라이브를 좋아했다. 오랜만의 드라이브와 흥얼거리는 노래에 슬픈 감정들이 사라져 갔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차 안을 가득 메우던 민영이의 향기가 사그라들자 민영이의 음성도 차츰 희미해져 갔다. 민영이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 푸른 산을 덮고 있는 하얀색 구름이 눈앞에 들어왔다. 곧, 민영이가 가장 좋아하는 수평선이 탁 트이게 보이는 바다가 보였다. 평일 오후 차 하나 없이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지나, 푸르른 바다 앞에 도착하자 설레할 민영이의 반응에 미소가 떠올랐다.


-촤악.. 촤악..-


하얀색 모래밭이 깔린 해수욕장과 파도소리가 가득한 넓디넓은 모래사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량한 산소가 가득한 공기를 한숨 들이키며, 민영이의 머리 뚜껑을 열어 로션을 발랐다.


Firefly_I open the SUV trunk door and sit in the back, looking out at the beach with the blue 447965.jpg


“민영아. 보여?”

“어..오빠. 진짜 너무 좋다. 여기 어디야?”

“강릉이야.”

“너무 좋다. 고마워. 오빠.”

“당장 해외 가기는 너무 힘들 오 보여서 우선 네가 좋아할 것 같은 바다로 왔어. 어때?”

“맞아. 내가 오빠랑 보고 싶었던 바다색깔이야.”


민영이랑 해보지 못했던 일들 중 첫 페이지를 바다 여행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물론, 꽤나 오랜 시간을 만나면서 다양한 추억들을 함께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꿈꿔왔던, 그리고 하고 싶었던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에 오롯이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민영이와의 대화를 집중하면 할수록 로션향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살냄새가 날아갈 때마다 점점 희미해지는 그녀의 음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여행을 오기 전,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 빈틈없이 차 있던 민영이가 조금씩 사라지는 모습에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민영이가 날 어떻게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볼지 몰라 착잡한 생각이 들 때마다, 표정을 감추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차에서 보이는 오션뷰를 배경으로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었다. 민영이의 음성을 놓치지 않으려 수시로 로션을 발랐던 탓일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민영이의 냄새가 곁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오빠!”

“어? 민영아.”


눈을 감자, 로션통이 아닌 민영이가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났다. 민영이를 보자마자,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도저히 제어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민영이를 온몸으로 껴안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보고 싶었어. 진짜 보고 싶었어.”

“나도..오빠 진짜 보고 싶었어.”

“미안해.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미안해.”

“이렇게 계속 있고 싶어. 오빠.”


Firefly_A 22 years old korean woman with healthy, dark bronze skin, a refreshing smile, wet h 865059.jpg


민영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벅차오르는 울음과 함께 서로 입술을 맞췄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그녀의 모습.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입술과 살결. 너무나 익숙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꿈이지만 민영이와 함께 공유했던 감촉 하나하나가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듯 사랑스러운 자극으로 느껴졌다.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꿈에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민영이의 온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어떤 일말의 예고도 없이 갑자기 눈을 비추는 햇빛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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