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안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오후 2시의 햇빛이 푸르른 나무 사이를 뚫고 날카롭게 내리쬔다. 사이렌처럼 울어대는 매미들. 뜨겁고 무거운 공기 사이로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답답하게 막혀있던 숨통이 조금씩 뚫어준다. 새까만 광이 빛나는 구두 옆으로 모래알만 한 개미들이 길게 줄을 지어 행차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끄윽.끄윽.”
“힘내라.”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에 흰색 수의를 입고 있는 여자친구 민영이가 차가운 철판 위에 누워서 불구덩이 속으로 입장한다.
“입관하겠습니다.”
“민영아! 민영아! 너 이렇게 가면 나는 어떻게 하냐! 민영아! 어!....억!”
“어머님!”
“누가 119 좀 불러줘요!”
민영이의 죽음에 누구보다 충격을 받았을 어머님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다. 3일 전 오후 10시, 졸음을 이기지 못한 화물차가 수십대의 차량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날 야근에 피곤함을 지워내지 못했던 민영이는 차도 한복판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곳으로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던 민영이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화장터로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어 차가운 옥색 납골함에 들어갔다. 환하게 웃는 민영이의 사진이 걸린 장례식장은 3일 내내 눈물과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민영이의 미소가 너무 눈부셨던 탓인지 사진을 볼 때마다 두 눈이 뜨겁게 달궈진 인두에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네. 아버님.”
“집에는 잘 들어갔나?”
“네.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방금 다시 잠들었네.”
“다음 주까지 휴가 받았습니다. 내일 병원에 한 번 찾아뵐게요.”
“아니야. 괜찮아. 자네도 일단 푹 쉬어. 뭘 병원까지 온다고.”
“그래도 한 번 가봐야 할..”
“이서방.”
“네. 장인어른.”
“자네가 민영이랑 만난 지 얼마나 되었던가?”
“4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래. 우리도 이제 자네가 남 같지가 않아.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어.”
“장인어른....”
“그런데, 자네만 보면 우리 민영이가 생각나서, 너무 힘들다네. 당분간만이라도 우리끼리 조용히 있고 싶네.”
“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구만. 다음에 연락함세.”
“네.”
-삐.삐.삐.삐.-
끊어진 전화기의 소리가 바이탈싸인처럼 깜빡거린다 사라졌다. 민영이와 행복한 나날들만 꿈꾸던 나의 꿈은 바람에 스러져간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민영이의 사고 소식을 들은 이후, 내 시야 앞에도 모래가 자주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태껏 많은 이별을 했지만, 이번 이별은 너무나 힘들었다. 우주에 혼자 남은 듯 한 외로움에 정신이 순간순간 아득해졌다. 아무 생각도 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 갑자기 떠오르는 민영이의 얼굴에 다시 눈앞이 뿌얘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화장실로 들어가 차가운 냉수에 세수를 하자, 희뿌옇게 번져있던 시야가 거품이 씻겨나가듯 선명해졌다. 세면대 위에 민영이가 선물해 준 로션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오빠는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거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할까?”
“귀찮아. 로션이나 스킨 바르는 거.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야?”
“관리 안 하면 오빠도 빨리 늙는다. 이건 오빠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따지지 말고 잘 바르자.”
“네. 네. 근데, 이 로션에서 네 냄새난다.”
“내 냄새?”
“어. 너한테 나는 냄새가 있거든. 근데, 이 냄새랑 네 냄새랑 거의 똑같네.”
“나도 이거 자주 쓰는데. 그래서 그런가?”
“좀 더 맡아보고 싶은데?”
“하여간 이 변태가.”
세면대 위에 놓인 로션통을 보자, 민영이와 함께 했던 날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고 로션을 얼굴에 펴 발랐다. 미끈한 감촉과 함께 낯익고 그리웠던 냄새. 민영이와 포옹할 때마다 내 코를 자극했던 그 냄새였다.
“오빠!”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리움이 극에 달했던 걸까?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오빠!”
“어? 이거 진짠데?”
“오빠!”
“민영아!”
“오빠! 여기야!”
“뭐야? 민영아! 어디야!”
“여기. 세면대 위에.”
민영이의 살냄새를 담고 있는 그 로션통이 뚜껑을 딸깍거리면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민.. 민영이?”
“오빠. 나야. 여기.”
“민영아. 왜 이렇게 됐어?”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정신 차려보니까 이렇게 되어있었어.”
“아프진 않아? 괜찮아?”
“보고 싶었어. 오빠.”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평생 널 잃는 줄 알았어.”
나는 한 줌에 들어올만한 크기로 변한 민영이를 품에 안고,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토해냈다. 옆에 있을 때 해주지 못했던 말들. 사소한 핑계로 들어주지 못했던 부탁들. 정말 소중한 줄 알면서도,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임에도, 모든 걸 잃고 후회하고 나서야 나는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던 내 진심을 온전히 전할 수 있었다.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더 보고 싶고, 더 안고 싶다.”
“나도 오빠 안아주고 싶어. 내 모습 잊은 건 아니지?”
“어떻게 널 잊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잔데.”
“오빠가 보기에 난 어땠는데?”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누구보다 눈 부시는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지. 소소하지만 행복한 꿈을 꾸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좋아하는 순수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눈부셨던 여자.”
“왜 이제야 그런 얘기를 해주는 거야.”
“미안해.”
민영이는 내 사과를 듣고는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그녀가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사라져 버린 그녀의 살냄새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민영이가 이미 죽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미친듯한 공허함이 몰려오더니, 다시 한번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가 나를 저 밑으로 끌어당겼다. 잠시지만 민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생각이 들자, 로션에서 났던 민영이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