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진 Aug 16. 2018

소확행과 자존감 파는 사회가 싫은 이유

8월의 이야기 아홉

# 1.


“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어.”


고작 스무살 때. 그러니까 10년 전. 요새 감성으로 풀이하자면 소확행주의자였던 이성 친구 A가 내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넌 어때. 가정과 일상과 소소한 행복이 우선이야, 아님 커리어의 성공과 사회적 인정을 좇는 게 우선이야?”


A가 내게 보내는 강렬한 시선을 고려할 때, 그는 본인 삶의 방향성에 대한 나의 적극적인 동의나 지지를 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겐 꿈과 직업과 사회적 인정 같은 게 훨씬 더 중요한 가치였다. 그래서 가차 없이 그에게 말했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당연히 후자야.”

A는 그 대답에 굉장히 불편한 눈치였지만, 난 당당했다.



# 2.


“넌 자존심은 되게 강한데 자존감은 많이 낮은 사람 같아.”


이건 다른 이성 친구 B가 나에 대해 내린 평가. 스무 살 때보다 한 서너 살 더 먹었을 때의 이야기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잘 알진 못했지만, 저 말이 부정적인 어감이란 건 금방 캐치해 냈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가 뭔데? 자존심은 너무 강하면 안 좋은 거고, 자존감은 낮을수록 안 좋은 거야? 그걸 판단내리는 일률적인 기준이 존재하는 거야? 그러니까 마치 소나 돼지의 품질 도장을 찍어내는 것처럼, 권위적인 누군가가 자존감과 자존심 잣대를 정해 놓고 당신은 자존감이 낮아서 실패, 당신은 자존감이 높으므로 합격 하고 낙인찍을 수 있는 거냐구.” 


그렇게 말을 해 놓고도 타인의 저 평가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쯤의 난 내가 도달하고 싶었던 꿈과 직업과 사회적 인정 같은 것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다.


그래서 저 말이 아팠다. B가 나에게 기준을 들이대는 순간, 난 나에 대한 확신을 잃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없어졌고, 무기력해졌고, 우울해졌다. 심리상담센터까지 찾게 됐던 이유다.



#3.


시간은 흘렀다. 몇 년이 훌쩍 지나갔다. 친한 이성 친구였던 A와도 B와도, 이제 서로의 바쁜 일상에 치여 연락하지 않게 됐다.


그러던 중 내가 A와 B를 떠올리게 된 건, 최근 소확행과 자존감 열풍이 불고 있어서다. 몇 년을 앞서간 트렌드 세터 A와 B가 개인적으로 내게 들이댔던 삶의 목적과 가치, 방향성에 대한 기준은 이제 사회적인 것이 됐다. 소소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지선(至善)인 것처럼, 낮은 자존감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내적인 기준 미달인 실패자인 것처럼, 어떤 사회적인 기준이 생겨났다.


그런데 소확행이나 자존감 같은 것들이 주목받게 된 계기를 생각하면 이런 현상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맞출 수 없는 사회적 기준, 바꿀 수 없는 사회적 구조, 그 기형적 구조 속에서 겪게 되는 내적인 갈등 같은 것들 때문에 소소한 행복이나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더욱 필요하게 된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젠 그런 것들마저 내가 노력해서 맞춰야만 하는 또 다른 성공 방정식이 됐다. ‘그것만 떠올리면 내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는’,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기준 하나가 더 생겨난 거다.



#4.


소확행이나 자존감을 다룬 서적이 금방 베스트셀러가 된다. 자존감 강연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린다. B의 자존감 어택을 온 몸으로 쳐 맞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인 잣대를 또 한 아름 떠안게 된 많은 사람들이 ‘난 왜 자존감이 낮지’, ‘난 왜 내가 하고 싶은 소소한 행복 하나도 알지 못하는 걸까’ 하고 근심 걱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난 이 과다기준 사회가 싫다. 소확행과 자존감 파는 사회가 싫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그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다 골병만 난다.


A는 그가 원했던 대로 행복한 연애를 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고 있는 것 같다. B는 높은 자존감을 발휘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커리어의 성공을 원하는 사람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존감은 낮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더 이상 실망하거나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다. 나는 고칠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다거나 내면의 회복 탄력성을 걱정하기보단, 고칠 수 없는 사회 구조를 헤쳐 나가거나 그 구조를 고쳐보는 데, 그러니까 성공이라든가 대의 같은 단어에 더 끌린다. 남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생긴 대로 사는 게, 혹여 그 길 속에서 자빠지더라도 더 낫다는 사실을 지금의 나는 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게 소확행이 아니라 대확행이라면, 그 길을 가자. 내가 자존감이 낮든 말든 난 원래 그다지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그냥 쭉 신경 쓰지 말자. 


내게 의미 있는 기준은 나만이 정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효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