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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Aug 17. 2018

가격에 대한 단상 5가지

8월의 이야기 열


1.

오늘 아침, 처음으로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불을 무서워해 라면도 컵라면만 먹는 난데, 도넛을 튀겼다. 말까지도 느리다고 늘 놀림을 받는 난데, 고객 응대에 빵 포장에 매장 진열에 매장 청소까지. (나름) 손이 보이지 않게 놀렸다. 그렇게 처음 허리를 폈을 때 '아, 그래도 곧 끝날 시간이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오, 반도 안 지났어?'라는 사실과 함께 찾아온 좌절감이 생생하다.

결국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에 와, 방금 전까지 쓰러져 잤다. 잠에서 깼을 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어제 산 삼천 원짜리 토이스토리 피규어는 알바 30분짜리. (솔직히 이건 잘 산 것 같다) 지금 눈 앞 메뉴판 속 7,500원짜리 로스까스는 알바 한 시간 짜리. 그러니까 평소 사랑해마지않던 9,000원짜리 치즈까스는 감히 알바 1시간으로는 사 먹을 수 없는 귀한 몸이 되시겠다.

그렇게, 내 세상의 가격 단위는 '원'이 아니라 '알'이 됐다. "여기요, 1(시간)알(바해야 먹을 수 있는 가격)의 로스까스 하나요."



2.

그렇게 로스까스로 몸보신을 하고 독서실로 향했다. (내가 일하는 독서실이라 다행히 '알' 걱정 없이 자리를 이용할 수 있다. 대신 최저임금도 못 받지만) 아는 분의 책이 나와서, 열심히 읽고 있다. 그런데 한 권 사서 들고 다니다 보니, 하얀 바코드 스티커가 회색으로 지저분해졌다. 자꾸 손에 걸려 그냥 떼내버리려는데, '값 11,000원'이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띈다. 

이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그분이 했던 2년 여의 노력이, 고작 만 천 원어치라는 거 같아서. 그 가격표가, 어쩌면 '최저임금 알바생' 혹은 '취준생'이라 적힌 채 내 이마에도 턱 하니 붙어있는 것만 같아서. 괜히 손톱으로 벅벅, 깨끗하게 긁어냈다. (라고 생각했는데 '만 천원X판매부수'니까 뭐... 가격 스티커 다시 붙여둘까...?)


3.

이쯤 되니 어릴 때 인터넷에서 한 어떤 테스트가 생각났다. '당신의 가치를 측정해보세요.' 대충 이런 제목이 붙어있었는데, 본인의 학교/재산/외모/친구 뭐 이런 걸 적어 넣으면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주는 사이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지극히도 현실적이면서 단순한 셈법에 소름이 끼치지만, 당시에는 큰 금액에 내심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아보면 큰돈도 아니었다. 서울에 있는 집 한 채 못 살 돈... 하하) 지금 다시 그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다면, 절대 내 가치를 함부로 계산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가치를 그렇게 가볍게 판단해?"라는 이유였으면 좀 멋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냥 그때보다 가격이 높지 않을 거 같아 무섭다.



4.

'햄스터 세일.' 책을 다 읽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 시장 어귀의 조그마한 구멍가게에 그렇게 붙어있었다. 평소 같으면 햄스터의 엉덩이 한번 영접하려고 정신이 없었을 텐데, 오늘은 그 문구가 영 씁쓸하다.

거 하면 얼마나 한다고. 거기서 또 깎나.

햄스터 엉덩이에 대고 얘기를 건넨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나도 맨날 세일되거든. 내 독서실 알바 한 시간은 최저시급에서 세일해 2,900원. 내 20대 후반은 '결혼 적령기 시즌'을 앞두고 세일해 눈 낮추는 이벤트 중.

평소 같으면 가게에 들어가 아이쇼핑이라도 했을, 세일 중인 화장품 가게도 그냥 지나친다. 어쩌면 너도, 제값을 다 인정받고 팔리고 싶진 않을까 싶어서. (는 사실 돈을 아껴야 해서지만)


5.

우울한 얘기만 하면 처지니까 마지막으로 희망적인 단상 하나. 그래도 살아갈 용기를 얻는 건, 이런 얘기 때문 아닐까.

 '월급 40만 원 육군병장 홍철, 4억 원 넘는 키미히 틀어막아. 나라를 위해 복무하다 나라를 대표해 월드컵에 나선 이들은 자신의 수백, 수천 배 연봉을 받는 선수들과 대결에서 당당히 승리를 쟁취했다.'

당장 내 한 시간은 2,900원짜리 또는 7,530원짜리지만. 그 가능성까지 2,900원짜리, 7,530원짜리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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