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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Aug 28. 2018

아빠가 계속 귀찮게 해줬으면 좋겠다

8월의 이야기 열일곱

아빠는 종종 나를 귀찮게 군다. “자 그러니까, 위나라가 어땠는 줄 알아?” 조조가 어쨌는데 셋째 아들 조비가 어쩌고... 춘추전국시대가 @#$%^&..... 촉나라는 이러쿵저러쿵. 하. 끝도 없다. 최대한 경청해보려 했는데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도 이미 지쳤다. 밥을 먹으며 응, 응, 대꾸를 해보지만 엔딩은 언제쯤 일지. “근데 말이야, 위나라 다음에 진나라는 어땠는지 알아?” 으악! 아침식사부터 중국 왕조 두 개는 너무 힘들다. “아빠! 아, 쫌!”  

    

아빠는 말이 많다. 식사 때 나오는 말의 90%는 아빠 몫이다. 대화가 많아서 좋겠다고? 그렇지 않다. 이건 대화라기보다 아빠의 독백, 아빠의 복습. 쉽게 말하면 아빠의 독후감 음성 버전이다. 아빠가 최근에 읽은 책 내용에 따라 대화 주제는 시공간을 넘나 든다. 중국의 역사였다가, 단백질의 생성과정이었다가, 미국의 금융위기까지. 어제는 이름도 생소한 ‘분묘기지권’과 전남 화순군 토지가 감정가 26배에 팔렸단 얘기를 30분 동안 들었다. 그의 음성 버전 독후감을 집중해 들으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아빠는 과장도 많다. 단골 메뉴는 수영. 10년째 수영을 꾸준히 다니고 있는 그의 허풍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이야~ 마, 내가 물살을 가로지르는데 내보다 빠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버터프라이는 이렇게 손가락까지, 어? 힘을 팍 줘가꼬 해야 된다 안켔나.” 10년 동안, 늘, 우리 아빠는 수영장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 빠르게 레이스를 완주하신다. 바다로 휴가를 갈 때면 누구보다 먼저 물안경을 챙기고는 물 밖에 나오지 않던 아빠를 생각하면,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가끔 벅찰 때도 있다. 과제하느라 새벽 4시에 눈을 붙이고, 입맛 하나 없이 꾸역꾸역 아침 식탁에 앉았을 때. 솔직히 단백질과 포도당의 관계를 듣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대답까지 하려면 더 그렇다. 그렇지만 침묵보단 낫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어느 날,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 아빠에게선 흰머리가 보인다. 옛날보다 순해진 눈썹도 보인다. 수영에서 돌아와 종아리에 쥐가 내렸단 말이, 잦아지는 그 빈도가 떠오른다. 식탁은 이내 걱정으로 가득 찬다.      


아빠가 계속 귀찮게 해줬으면 좋겠다. 한결같이 내게 중국의 역사를 물어보고, ‘쌀뜻물’과 ‘쌀뜨물’ 중 올바른 표기법은 무엇인지 골라보라 하고, 그날 골프 라운딩을 자랑하고, 드라마 줄거리를 끝도 없이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아빠가 방에 들어왔다. “딸, 그거 알아? 스도쿠 있잖아. 이거 푸는데도 다 비법이 있어. 첫 번째는 뭐냐면 일단 이 칸에서 벗어나야 해, 자 봐봐 이 아홉 칸짜리, 여기서 벗어나서 시야를 넓혀야 돼, 어? 잘 보면 여기에 9가 있는데, 세로가..... 그다음엔......” 으악, “아빠! 제발 일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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