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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편지 - 마당 소똥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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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김경래
Aug 12. 2024
[집이 있는 여행] 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담양 면앙정
담양을 생각하면
대숲서 맑은 바람이 인다. 바람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담양의 대숲에는 그런 풍류가 있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배경이 된 땅이다. 많은 시인들이 이 땅서 났고 이곳을 찾아 공부했고 또 은둔해 살았다. 대숲길이나 산자락 강변 하나하나 문학 아닌 것이 없다. 퇴계 이황의 흔적이 있고 송강 정철이 있다.
방랑시인 임제 백호나 사단칠정 논쟁으로 유명한 성리학자 기대승,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 등도 이곳서 학문적 기반을 다졌고, 시를 읊었고 노래를 불렀다. 모두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 우두머리가 송순이다. 그에게 배움을 얻었거나 영향을 받았다. ‘면앙정(俛仰亭)’이 그의 호다. ‘땅을 굽어
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정자’란 뜻이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둘러두고 보노라
송순의 시다.
평생을 노력해 세 칸짜리 초가집을 지었다. 한 칸을 요즘 크기로 환산하면 약 6㎡ 정도로 두 평이 채 안 된다. 세 칸이면 18㎡(5.5평) 정도 넓이다.
너무 작은 집이다. 나 한 칸 차지하고 달에게 한 칸 주고 맑은 바람에게 또 한 칸을 내주고 나니 강산은 들여놓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문밖에 빙 둘러놓고 보기로 했다.
아무리 작은 집에 살아도 마음이 온 자연을 품고 있다면 그 마음의 부피는 호방하고 여유롭다. 선비가 자연을 즐기는 마음의 극치를 본다.
송순은 당대의 세도가였다. 요즘으로 치면 검찰총장 격인 대사헌에 차관급인 우참찬을 지낸 인물이다.
이런 세도가가 겨우 세 칸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궐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저택에서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집이 아무리 커도 그곳에 들여놓을 여유로움이 없다면 선비의 풍류도 끝이다.
그래서 송순은 자연을 가득 들일 작지만 큰 집을 짓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마흔하나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낙향해 담양 제월봉 아래에 면앙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자신의 호가 그대로 정자의 이름이 됐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짜리 집이다. 아주 소박하다. 추녀 끝은 네 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다. 현재는 목조 기와집인데 처음 지을 때는 초가지붕의 정자로 바람과 비를 겨우 가릴 정도였다 한다.
가운데 한 칸 방이 있고 빙 둘러 마루가 있다. 마루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을 게다.
여기에 퇴계 이황을 비롯해 송강 정철, 임제 백호는 물론, 인근의 소쇄원 주인 양산보 그 밖에도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소세양 윤두수 노진 등 당대의 유명 학자와 시인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쟁쟁한 사대부들의 출입으로 자연스럽게 호남 제일의 ‘면앙정가단’이 만들어졌다. 삶과 학문을 논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풍류집단이다.
소박해 초라하기까지 한 외관과 달리 정자 내부에는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 임제 백호의 '면앙정부', 석천 임억령의 '면앙정 30경', 송순 자신의 '면앙정 삼언가'가 판각돼 걸려 있다.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의 시도 걸려 있다.
송순이 지은 '면앙정가'는 영호남 가사 문학의 원조다. 정철이 영향을 받아 면앙정을 드나들며 '성산별곡'을 완성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호를 딴 정자 송강정을 짓고 사미인곡을 썼다.
나와 달과 청풍을 들이고 나면 더 이상 들여놓을 자리가 없는 초라한 세 칸짜리 정자에서 우리나라 가사문학이 싹텄고 살쪘다.
집이 크다고 큰 의미가 이는 것도, 큰 삶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작은 집도 우주를 담을 수 있다.
자연을 담고 뜻을 담아놓으면 큰 집이 된다. 굳이 집안에 가두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둘러놓고 즐기는 여유로움을 면앙정서 배운다.
지금의 정자 앞마당에는 '면앙정가' 한 구절을 새긴 비가 있고 송순이 정자를 지은 뒤 심었다는 참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가리고 서 있다.
남도의 푸르름이 참나무잎에 걸려있다. 대숲 바람처럼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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