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번역 후유증 2

몸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

by 정시체

한번 몸에 나타난 증상은 절대 그냥은 사라지지 않고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서히 번져 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학업 스트레스가 이제는 업무 스트레스라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명은 그렇다 쳐도, 마비는 정말 몸에 이상이 있어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 근처 대학 병원에서 근전도 검사를 받았다. 손과 발에 전선을 연결하고 몸의 신호를 측정했는데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따뜻한 인상의 교수님이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처방해 주면서 평소에 마음을 편히 갖고 잘 먹고 푹 자라고, 그게 제일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몸에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론 씁쓸하고 막막했다.


아무 이상도 없는데 증세가 있을 때만큼 무력할 때가 없다. 뭘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는지 구체적인 해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니 모든 게 나약한 내 탓 같았다. 충분히 마음을 편히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던 걸까? 사실 어떤 게 마음이 편한 건지,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문제라면 결국 갈 곳은 정신과뿐이다.


간단한 검사 후 잠깐의 대면 진료에서 의사는 대뜸 말했다. “우울하시네요” 그러면서 심층 상담을 권했다. 사실 우울함 때문에 정신과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마비와 이명 때문에 생활이 불편했고, 그 증상들을 없애고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한껏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던 신경을, 약을 먹어서라도 강제로 느슨하게 늦추고 싶었다.


내가 찾아간 병원은 그냥 집 근처 동네 의원이었다. 감기에 걸려 내과를 찾는 것과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방문했다. 상담보다는 주로 짧은 면담과 약 처방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의사 외에 상담사가 별도로 있거나, 상담 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병원을 찾은 환자 중에서 더 깊은 상담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상담을 진행하는 듯했다.


나는 갓 대학원을 졸업하고 번역가로 자리를 잡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단계였다. 그래서 여러모로 굉장히 쪼들리고 있었다.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늘 쫓기는 기분이었다. 병원은 집에서 불과 도보 십 분 거리였는데도, 병원에 가려고 준비하는 시간과 다녀오는 시간이 아까웠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상담을 받는 시간도 모두 너무 아까웠다. 무엇보다 나는 돈이 없었다. 한 회 상담료가 결코 싸지 않을 텐데, 꾸준히 그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의사는 내가 묻기도 전에 상담 방식과 가격을 상세히 안내해 주었다. 원래 상담료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인데 보험이 적용되도록 조치해 주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진료비가 싸진다는 이유로 덜컥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상담을 받는 기간 동안 계속해서 의료 기록에 F 자가 찍힌다는 뜻이었다. 국제질병 분류 체계에 따르면 F는 정신과 질환을 뜻하는 글자로, 우울, 불안 등을 비롯한 모든 정신과 질환의 코드 앞에 붙는다고 한다. 의료 기록에 F로 시작되는 항목이 있으면 제한되는 활동이 생기므로, 낙인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보험 가입이 힘들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상담 전후의 심적인 부담, 상담 도중의 피로감 때문에 어서 모든 상담을 끝내고 싶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랬다.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 시간은 거의 한 시간이나 됐고, 의사는 별로 말이 없었다. 주어진 빈 시간과 진료실에 감도는 침묵을 메우기 위해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돈을 내고 상담을 받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올 순 없었다. 병원에 가기 전, 마치 발표 준비를 하듯 그날 할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목록으로 정리했다. 상담이 끝나면 진이 빠져 녹초가 되어 버렸다.


처음 한두 해 동안은 주로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가족 문제 같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 카테고리에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었다. 쳐다보고 싶지 않아서 한데 싸잡아 욱여넣었던 기억들을 다시금 끄집어 내어, 시간순으로 하나하나 나열하고 일일이 태그를 달아 분류했다.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도 않았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사실에 또 타격을 입었다. 떠올리려고 노력할 때마다 마비 증세가 도졌다.


마비와 이명 때문에 번역 일을 하기 힘들어져 정신과를 찾았는데 증세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느닷없이 과거의 망령들과 마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전 20화(20) 번역 후유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