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재·8
해남역
남해선 철도 해남역이 25년 9월 27일 개통되었다. 2칸짜리 열차는 목포에서 부전역까지 운행한다. 일상의 발이 되어주는 운송수단인 해남역 개통으로 소외된 지역민들에게 편리해진 도시 이동과 주말이면 운행되는 남도해양 관광열차는 다양한 철도 관광 상품으로 발전하겠지.
하지만 해남읍의 외곽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은 떨어지는 듯하다. 물론 기차 시간에 맞춰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지만 해남역이라 이름 붙이기엔 어중간한 위치에 있다.
박인하 시인과 그 수강생들의 문학기행. 해남역에서 순천역까지 낭만 기차여행이다. 김연아 총무가 준비한 삶은 계란과 칠성사이다 그리고 귤은 추억을 되살리게 한다.
나는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지
그대와 함께 떠났던, 그대가 좋아지던 푸른 시절을 생각하며
내겐 탄산수 같이 톡 쏘지 못한 마음이 있고
탄산수 같이 살 수 없는 몸이 있고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생이 넝마처럼 앉아 있지
기차에 실려 가는 입영전야의 훈련병처럼
깊은 물속에 생각을 가두고 마시는 사이다는
내가 놓치고 온 시간들
내 안에 꼿꼿하게 살아 끝내 치유되지 않는 마음에
그대와 좋아 지내던 시절이
계란과 사이다 사이에 있었지
- 계란과 사이다
대흥사
고구마 도시락 싸들고 대흥사 나 홀로 단풍구경 간다. 남쪽의 단풍은 한 템포 느리게 색이 칠해지나 보다. 절정도 절창도 아닌 어정쩡한 나무들 사이로 도착한 카페 유선에서 커피 한 잔 사들고 들어선 대흥사 구석구석 기웃거린다. 지난해 공사 중이던 대웅전은 완공되어 두륜산 누워있는 와불을 지키고 대웅전 오르는 계단 옆 감나무 붉은 감들이 먼저와 가을을 알리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서 청승 아닌 낭만 암튼 고구마 도시락으로 가을을 먹고 있다.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바라본다는 건 서로 어떤 기분일까. 한참을 그렇게 고구마에 가을 풍경을 버무리고 이서유 작가가 선물로 준 바다 빛 에코백 나무에 걸어놓고 기념사진 남기며 그림자 하나 없는 입구를 나온다.
입구 광장에서는 ‘대흥사 단풍 축제’ 품바 춤과 노래가 두륜산을 흔들고 있다. 머그잔에 책 표지 새겨 사들고 어두워지기 전 돌아왔는데 인하시인과 언주작가의 데이트 신청 다시 대흥사 간다. 밤의 대흥사는 축제로 술렁거리고, 술렁거림 속 할매 조끼 하나씩 사들고 왔다. 우리의 할매 조끼가 백련재 퇴소할 때까지 우리를 각인시켜준 옷이다. 멋은 없어도 등 따뜻하면 그만이지.
설아다원
녹차 밭을 거닐며 녹차 꽃이 되고 싶었다. 어쩜 녹차 잎 우려내듯 내 속을 밀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님 그녀의 깊이를 알고 싶었을까.
녹색 나무 아래 쌓인 흰 눈 바라보다 어떤 그리움이 여기까지 오게 하였을까 다시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런 그녀가 녹차 밭을 놓고 집을 나섰다.
유랑은 먼가요. 암자는 깊은가요. 삭발은 수행인가요. 다원에서의 판소리 음악회는 파괴되었나요.
유랑은 얼굴을 찾는 것. 수행은 득음을 갖는 것. 파괴는 창조를 위한 발걸음이지요.
그녀는 떠났고, 나는 찬바람에 푸른 잎들이 파르르 떠는 녹차 밭에서 시방(지금)의 오두막 구들장의 온기를 궁둥이 내주었던 날, 화로에 군고구마 제 몸 불사르며 달콤함을 전해주던 날. 장구 장단에 판소리 한 자락 뽑던 날들이 내 어깨 위에 걸터앉는다.
설아다원 마승미 명창은 1년간 유랑자가 되어 보겠다며 집을 떠났다. 어느 절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삭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수께끼는 아니지만 수수께끼 같은 그녀의 삶이 녹차 잎 우려 나오듯 잘 녹아 더 깊은 소리꾼으로 우리 곁에 오기를 기대해 본다.
두미원
타닥타닥 아궁이에서 장작이 음악회를 열고 있다. 가끔씩 번쩍이는 붉은 조명은 고구마에 불붙어 화장실 가는 어두운 밤길을 열어주고 있다. 화장실은 외부에 있어 핸드폰 불빛을 빌려야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인하, 언주 작가와 구들장에 스며든 냉갈(연기) 냄새로 감귤 까며 밤새워 비매품 단편소설 혹은 문단의 역사서를 쓰며 쉬었던 곳. 노곤한 몸 지지며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에 레몬 디톡스는 백련재 외박을 비밀로 붙이곤 하였지.
공장 층층의 메주들은 몸 말리며 겨울밤하늘 별들에게 이야기 하나씩 올리는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는 김연아 대표의 공장 두미원은 삼산면에 있다. 김연아 대표는 전통발효식품인 된장, 고추장, 조선간장, 누룽지, 오란다, 청국장등을 가공하여 판매한다. 땅끝순례문학관 수강생으로 틈틈이 썼던 글로 문학지에 등단한 작가다.
고천암
한해의 마지막 날 가창오리 떼 군무 만나러 황산면에 위치한 생태공원 철새 도래지 고천암 간다. 고천암은 간척 전의 ‘고천(바다/해안)’에서 1963년 간척으로 바다가 메워지며 ‘고천’이 ‘고천암’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 담수호다.
겨울, 노트에 펼쳐진 들녘 수만의 날개 짓 새떼들의 군무. 흘림체로 갈겨쓴 문장이 허공을 긋고 있다. 담수호 물결과 함께 출렁거리는 오리가족과 갈대숲을 거닐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잠시 귀 기울여 보는 순간. 구름에 흔들리던 바람 한 점 얼굴에 갈대 지문을 찍고 간다.
갈대 탐방로 배 모양의 갈대 징검다리 출렁거리는 건 갈대도 길도 아닌 내가 흔들리는데 갈대는 내 심장을 찔러보고 나는 갈대를 째려보고 구름으로 회색 칠한 하늘은 사는 것이 출렁이다 사라지고 흔들리다 사라지는 것인 인생이라 말하는 듯 나는 갈대 앞에 겸손해진다.
너희의 계절이 왔어
갈대꽃 지고
황량한 들녘에 말라가는 곡식 알갱이
겨울 볕으로 받아 안는
너희의 계절을 만났어
지나온 계절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너희 안에 저장되었던 말들이
이야기가 되기까지 기다린 시간이
참 길었을 거야
너희를 알리기 위해 매일을 날아왔고
날아왔다는 건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겠지
오늘의 군무가 내일이 될 수 없는
내가 너희를 볼 때
너희도 나를 보았을까
너희가 펼쳐낸 군무를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이 순간 목격자이고
나의 표정과 몸짓은 너희들만 알겠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이 순간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죽지 말고
오래도록 살아서 겨울 풍경이 되어줘
너희가 들녘에 펼치는 몸의 언어들
너희가 허공에 흘림체로 갈겨쓴 문장들
눈이 아프도록 담아둘 거야
-가창오리 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