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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숲 Jun 03. 2020

풍경 값 천육백원

풍경을 테이크 아웃하여 마음에 담습니다


 올해 전근을 가면서 근무지가 바뀌었다. 가까운 곳으로 발령이 나길 조마조마 기다렸지만 집 가까운 곳은 다음 기회로 미뤄지고. (언젠가는 가까운 곳으로 다닐 수 있겠죠.) 새 근무지는 지하철 공사 구간을 지나기 때문에 출근길에 차가 막히는 일은 다반사다. 전 근무지도 4년간 상습적으로 막히는 고속도로를  다녔기에 차가 막히는 것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 경지에 올랐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볍게 출근하는 친구를 보면 여전히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요즘은 출근길이 처음처럼 지치지만은 않는다. 바로 풍경 값 천육백원 덕분.


  새롭게 출근하는 길에 민자 터널이 있다. 터널 편도 비용은 팔백원, 왕복 천육백원이다. 처음엔 통행료까지 내야 해? 했는데 요즘은 통행료 천육백원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3월 말엔 한창 차가운 바람 속에도 터널 주변에 노란 개나리가 응원단처럼 피어났고, 4월로 넘어가니 오래된 벚나무들이 줄줄이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했다. 신호 대기 중에 환하게 빛나던 벚나무를 볼 때마다 ‘오늘은 꽃이 이만큼 피었구나. 아, 어제 내린 비로 꽃잎들이 반이나 떨어졌나 봐. 그러고 보니 이제는 초록 이파리들이 자라나네.’ 하며 꽃의 생사를 확인하며 지냈다. 어디 벚나무뿐인가. 5월로 넘어가니 아카시아 나무들이 하얗게 꽃잎을 늘이고 향기로운 인사를 건넨다. 덕분에 5월이 아카시아가 피는 계절인걸 안다. 하얀 꽃들 속에 벌들은 부지런히 꿀을 모으고 다닐 테지. 온통 푸른 잎들 사이에서 하얗게 빛나는 아카시아는 왕관을 쓰고 있는 숲의 요정 같기만 하다. 또한, 터널 입구 중앙분리대에는 누군가 심어놓은 자작나무 무른 잎들이 언제부터인가 햇빛에 반짝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초록이 짙어지고 반들반들해졌다. 그를 지나갈 때면 나는 항상 그의 반들거리는 잎사귀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오늘도 우리 서로 파이팅하자. 뭐 이런 마음입니다^^;)


 어둠을 지나야 밝음이 나온다. 언젠가 양양 가는 길에 10킬로미터가 넘는 터널을 지나가며 터널의 끝이 언제 나올까 한 적이 있다. 물론 터널이 긴 만큼 터널 벽면의 조형물이나 알록달록한 조명들을 보는 재미가 있긴 했지만 터널 끝의 환한 빛이 몹시도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반면에 출근길의 터널은 1킬로미터가 약간 넘는 거리. 그래서 빨리 어둠을 보내고 터널 끝의 산과 하늘을 맞을 수 있다. 반타원형의 터널 끝의 풍경은 매번 변하는 그림이며, 나는 그림 안으로 빠져드는 에드먼드와 루시, 유스터스가 된다.(에드먼드들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서 새벽 출정호의 항해가 시작되죠. 딸이 아주 좋아하는 나니아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림 안으로 들어가 모험이 펼쳐지려는 순간, 요금소가 나오고 현실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터널 요금을 지불하고 나면 아침과 다른 산의 풍경에 마음이 설렌다. 전나무가 총총하게 심겨 내려온 산자락을 보고 있으면 꼭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것만 같다. 터널까지 들어가는 짧은 시간에 청태산을 닮은 전나무 군락지와 활엽수로 덮여 점점 진해지는 산 능선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아주 짧은 어둠 뒤에 만나는 자작나무와 환한 벚나무, 그리고 푸른 풍경을 테이크 아웃한다.


 짧은 순간에 지불하는 풍경 값 천육백원 덕에 출퇴근 길이 약간 가벼워졌다. 건물 빽빽한 도시에서 한 줌 초록을 만나는 것이 이처럼 마음을 달콤하게 하다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질 풍경 덕을 보고 사는 것이 마음 건강에 도움되는 일은 분명한 것 같다.





어제 출근길에 보니, 빛나던 아카시아 꽃잎들은 어느새 갈빛으로 변해
처연히 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장미가 피어나기 시작하더군요. 아, 6월은 장미의 계절인가 봅니다.
주목을 받았다가도 사라지는 것이 꽃들에게는 참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참, 대상포진은 다소 호전되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걱정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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