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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숲 Aug 29. 2020

닮아간다는 것이 주는 위안

닮은 사람들끼리 다정한 시선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차가 지나가던 시골집 마당엔 가을배추가 익어가고 있었다. 마당 한편엔 대추나무가 제 무게를 간신히 버티면서 열매를 내주고, 또 한편엔 노란 감들이 적당히 열린 키 큰 감나무가 내다보이던 할아버지 집. 그곳엔 종일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누런 소도 있었다. 어디 누런 소뿐인가. 마루 밑에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누에도 있었다. 하얀 누에들이 방바닥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아랫방엔 끊임없이 박제된 시간들이 매듭으로 끊어지곤 했다.


 시선을 내부로 옮겨보면, 부엌과 연결된 안방 서랍장 위에는 옛날 사진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자식들의 사진과 그  자식들의 사진들은 해가 갈수록 늘어갔던 것 같다. 물론 손녀인 나의 사진도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랍장 옆, 문지방 위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걸려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들의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둔 것이었다. 흑백의 사진에서 더 환해지는 얼굴. 사람들은 특히 할아버지 사진을 보며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똑 닮았다고 했다. 어린 내 눈에도 할아버지 사진, 그 안에 아버지가 보였다. 다문 입매와 다소 뚝뚝한 눈매에 이마의 주름까지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는 꽤 엄하셨다고 하지만 어머니의 기억을 빌리자면 어린 손녀에게는 무척 다정하셨다고 한다. 한 달에 몇 번씩 어린 손녀들을 보러 오셨을 정도로. 새벽에 길을 나서 경주역에서 부산 광안리까지, 버스만 서너 번 갈아타시고 오셔서 우리들과 놀아주고 가셨다고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서 오셨다가 간단히 점심을 드신 후 다시 버스를 서너 번 갈아타고 시골집으로 돌아가셨을 할아버지. 오직 보고 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꽤 먼길을 오가셨던 것이다.


 시골집 마당에는  클래식한 바퀴가 인상적이던 할아버지의 자전거가 항상 세워져 있었다. 동생과 나는 페달을 손으로 굴리면서 동그란 바퀴가 쓱쓱 소리를 내며 구르는 걸 보기를 좋아했다. 놀다가 목이 마르면 달콤한 요구르트를 먹곤 했다. 시골집에 가면 요구르트 여러 개가 시원한 얼음물에 담가져 있었으니 하나 골라 겉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 마시기만 하면 되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할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고 미리 읍에 나가 요구르트며 과자를 사다 놓으신 거였다. 그저 다정하게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에 시골집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지난달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 고향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사과며 복숭아며 감자 등을 나눠 주시러 오신 것인데, 할아버지 오시는 날을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나의 할아버지가 그러셨듯 할아버지와 꼭 닮으신 아버지는 자주 우리 집에 오셔서 아이들을 봐주셨다. 종일 아이들과 복작거리며 있다가 아버지가 오시면 나는 잠시 외출이라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아이들은 저희를 그렇게 예뻐해 주시는 할아버지와 까르륵 거리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복직하고 나서도 급한 일이 있을 때 자주 유치원 등 하원도 도와주시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아주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얼굴도 닮았지만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똑 닮으셨던 것이다.


 며칠 전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 안에서 이제 언뜻 아버지가 보인다. 사람들이 날더러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했지만 진작 나는 거울을 아무리 봐도 “나”만 있었지 아버지와 닮은 점을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 얼굴에 비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서도 새삼스럽게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다소 강한 성격의 아버지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손주들에게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에게 점점 다정해지시는 아버지. 그렇게 좋은 면도 조금씩 닮아가겠지.

  

 이제는 옛 시골집에 사람의 온기는 없지만 그것을 세세히 떠올리는 내 마음속엔 여전히 식지 않은 온기가 남아있다. 내가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저 사랑받았던 기억에 마음에 온기를 느끼듯 우리 아이들도 훗날 그렇게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면 좋겠다. 얼굴이 닮은 사람들이 서로의 좋은 점까지도 닮아 간다는 것은 살면서 참 위안이 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좋은 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다정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서로 닮은 꽃들이 의지하며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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