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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숲 Sep 06. 2020

몰입하는 일들

그야말로 멋진 초능력

 태풍이 지나가고 하늘이 잠시 개였던 날, 딸내미가 함께 쓰자고 내민 교환일기에는 멤버 프로필을 적는 란이 있었다. 항목으로는 이름, 별명, 생일, 혈액형,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연예인, 내 인생영화, 무인도에 간다면 가져갈 3가지 그리고 갖고 싶은 초능력이 있었다. 오밀조밀한 글씨로 적힌 딸의 프로필을 보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별명은 소금별이요, 별자리는 황소자리
좋아하는 연예인은 딱히...
좋아하는 음식은 맛있는 음식, 내 인생영화는 지브리나 디즈니 영화
무인도에 간다면 가져갈 3가지는 가족, 음식&물, 생존 도구
마지막으로 갖고 싶은 초능력은 순간이동능력 (해리포터처럼.)

그러면서 엄마는 갖고 싶은 초능력이 뭐냐고 묻는다.

엄마도 순간이동능력을 가지고 싶어. 눈을 감은 후, 가고 싶은 곳을 머리에 떠올리고 그곳의 공기와 햇살과 바람을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눈을 뜨면 그곳의 햇살이 내 머리 위로 비치는 거지. 그리고 헤르미온느의 마법 주머니가 엄마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어. 주머니에서 텐트를 꺼내
후딱 치고, 아주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서 실컷 읽다가 왔으면 좋겠다.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말로 순간이동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그야말로 멋진 초능력이 아닌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와 환경의 경계를 스스로 통제하는 자유를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초능력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딸이 건네준 교환일기를 보며 내 몫의 빈칸을 나름 채우다가 엄마가 쓴 건 어떠냐고 딸을 불렀다. 서너 번 불러도 대답이 없던 딸아이. 가서 보니 책을 읽고 있다. 에이번리의 앤(빨강머리 앤 시리즈를  열 번도 넘게 읽었을 정도로 딸이 좋아하는 책이지요.)의 책장을 넘기는 딸을 한 번 더 불러보려다 그냥 나왔다. 이미 딸은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 있었기 때문에.


 딸은 에이번리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여섯의 앤 곁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책에 몰입하는 것으로 저도 모르게 갖고 싶은 초능력을 하나 얻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영화에서나 보는 드라마틱한 초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몰입으로 인해 그 능력에 닿을 수 있다.


 몰입은 “무언가에 흠뻑 빠져 심취해 있는 무아지경의 상태”로 주변의 모든 잡념 방해물을 차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며, 일단 몰입을 하면 자신이 몰입하는 대상이 더 자세하고 뚜렷하게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몰입 상태에서는 자기와 환경의 구분이 거의 사라질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도 망각하게 된다고. 그래서 시간이 보통 때보다 빨리 지나가고 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 안에 펼쳐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책에 몰입을 하게 되면 책의 장소로, 일에 몰입하면 그 일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으로, 추억에 몰입을 하게 되면 과거의 그 순간으로 우리는 갈 수 있게 된다.


 한편, 몰입하는 대상이 사람이면 그리운 사람에게로 우리는 갈 수 있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그것을 담은 시가 있다.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며 언어에 몰입하여 공감을 얻는 문장을 펼쳐놓는다.


얼음의 온도
                                                    허연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은, 차가운 얼음의 온도와 뜨거운 불의 온도를 잊는 것처럼 온전히 빠지는 것이다.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이라는 건, 아마도 인간은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의미가 아닐까.


 몰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더 즐기고 행복하게 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더 잘 적응하도록 돕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몰입이야말로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몰입하게 된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애정 하는 책이나 사물이든, 열정적인 일에 몰입하는 일, 또는 연인 사이든, 부모와 자식 사이든, 부부 사이든, 친구 사이든, 이웃 사이든, 서로 애정을 가지고 몰입하여 마음을 나누는 일, 그리고 자연과 환경에 몰입하여 공감하고 아끼는 일, 이렇게 어떤 대상에 몰입하여 사랑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따뜻하게 하며,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초능력이 아닐까.


 몰입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몰입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확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그럼 오늘은 딸아이와 함께 책장에 쌓여있는 책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좀 가져봐야겠다. 그리고 읽기를 미뤄뒀던 톨스토이를 피고 러시아로 순간이동을 해보리라.(천 페이지쯤 되는데 금방 읽을 수 있겠지요? 몰입의 초능력을 빌려온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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