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모도 해명산 백패킹
하나의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식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특히 백패킹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아직 여름옷을 입으니 배낭의 무게도 적당히 견딜만하고, 습기가 적은 보송한 바람을 맞으며 산행을 하는 즐거움도 크며, 밤이 되어도 바람막이 점퍼와 긴 팔 셔츠 한 장이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아무튼 여러모로 백패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계절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렘은 언제나 나를 움직이게 한다.
강화 석모도의 주봉인 해명산을 오르기로 했다. 해명산은 327미터로 그리 높지 않지만 해명산에서 낙가산, 상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트레킹을 하다 보면 서해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매력적인 곳이다. 낙가산엔 보문사로 향하는 길이 있어서 보통 해명산에서 보문사까지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나와 옆지기도 일단 해명산을 오른 후 낙가산 쪽으로 트레킹을 해보기로 했다.
들머리인 전득이 고개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약 이십여분 만에 조망이 보이는 스폿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다소 흐린 하늘에 낮게 깔린 구름과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해와 강화섬쌀이 익어가는 논이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는 잠시 땀을 식히며 풍경을 바라보다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역시 쉬운 산은 없다. 산새가 험하지 않은 산이라고 했지만 해명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었다. 평탄한 코스가 이어지다가도 곳곳에 누군가 옮겨놓았을 것만 같은 바위들이 우뚝 솟아있거나 날카로운 돌들이 등산로에 공룡뼈 조각처럼 박혀있어 조심히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덕분에 바위틈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소담스레 피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작은 바위틈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또 피어났겠지. 비를 맞고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났으리라.
한참을 오르다 보니 후두둑 후두둑 낮게 깔린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 비를 맞고, 서너 방울 더 비를 맞다 보니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다 이내 먼데 하늘에서 희미한 햇살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 비는 오래가지 않겠구나. 기상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비를 맞으며 해명산 정산까지 올라갔다. 예상대로 정상에서부터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한동안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이 또 나올거라 생각하니 부담스럽기도 했다. 거기다 암릉 구간이 더욱 많아졌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걷다 보니 어느새 낙가산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언제나 갈길이 멀어 보일 때는 천천히 앞을 보고 조금씩 걸음을 옮기면 되었다. 이번에도 멀리서 보이던 능선의 큰 바위까지만 가보자 했는데 어느새 보니 도착해있더라. 그 바위는 텐트를 치기에는 무리였지만 잠시 쉬어가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산 아래 마을과 논들, 멀리 장봉도와 동만도 서만도까지 조망이 되었고 지나온 산새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었다. 구름 뒤로 은은한 햇살이 빛나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왔다.
슬슬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낮에 등산길에 봐 두었던 평평하고 너른 박지로 가기 위해 다시 해명산 쪽으로 방향을 옮겨 걷기 시작했다. 그 박지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돌아가는 길이다 보니 아까의 내리막길은 다시 오르막이 된다. 암릉으로 이어진 험한 내리막길은 다시 험한 오르막길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에너지는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다. 심박수가 빨라지고 빨라진 심박수는 숲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게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기분 좋음을 느꼈다. 맞다. 기분 좋은 힘듦인 것이다.
도착한 박지에는 우리만이 있었고 간단히 텐트를 치고 나니 해가 지고 있었다. 분명 등산을 시작할 때에는 비가 내렸었는데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고 덕분에 서해 바다로 지는 황홀한 노을을 만날 수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산에 올라와야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부드러운 바다의 물결과 군데군데 떠있는 섬들과 떨어지는 해가 비추는 황금물결은 여기 능선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해가 바다 위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감동은 쉽사리 가라앉지 못했다.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서쪽을 보면 섬과 바다 광활한 하늘이고 동쪽을 보면 강화도의 집들과 그 너머의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지자 산 아래 빛이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도 아름답지만 지상의 별도 그에 못지않더라. 도로의 가로등과 집집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일렁거렸다.
우리는 상큼한 영귤차를 나눠 마시며 너럭바위에 앉아 컴컴한 밤이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난 여름 제주에 가서 차를 몇 가지 사 왔답니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차는 힐링이 되더군요^^) 밤이 짙어지자 산은 더욱 어두워지고 산아래 마을은 밝아졌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잠이 들었다. 한밤의 별들을 봐야 하는데 눈꺼풀은 잠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한밤의 별은 보지 못했지만 일찍 잠든 덕분에 새벽에 빛나는 달을 볼 수 있었다.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바다에 은은한 빛을 드리우고 어두운 숲과 마을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을 마음에 담아 가야지. 행복한 순간을 많이 담아두면 힘들 때 언제고 꺼내볼 수 있다.
달빛과의 조우를 끝으로 해가 뜨기 전에 어제 머물렀던 곳을 정리하고 산을 내려왔다. 청명한 날에 보는 산과 바다와 섬들은 어제와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나는 계속 산을 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심장이 요동치며 힘든 순간은 분명 있지만 그래도 산 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을 만날 수 있기에. 달빛이기도 했다가 바다이기도 했다가 바람이기도 했다가 산그림자이기도 했다가 노을이기도 한 그 모든 풍경과의 만남이 위로가 되고 행복이 된다는 건 참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