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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숲 Aug 20. 2022

기차 타고 떠난 민둥산 백패킹

때론,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살다 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우연히 먼 곳의 기차 사진이나 낯선 도시의 해질녘 사진을 보게 되면 신기하게도 실제로 여행을 가는 것만 같이 설레곤 한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나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쩌면 외로움이 필요한 그런 때.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밀려들면 나는 마침내 깨닫는 것이다. 등산화와 배낭에 먼지가 제법 내려앉았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산을 올라간 지 꽤 여러 달이 지나갔더라.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 본 것은? 그건 여러 해 전이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기차를 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차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강원도 정선에 있는 민둥산으로 백패킹을 가기로 하였다. 민둥산역은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두 시간 사십 분 정도 달리면 된다. 아주 오랜만에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열차에서 내려 민둥산역 근처에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강원도에 왔으니 곤드레밥을 먹어야겠지.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은 때론 그곳의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옆지기는 황태해장국을, 나는 곤드레밥을 먹었다.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황태해장국은 이곳이 아주 멋진 곳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식당에서 나와 걷기 시작한지 이십여 분 만에 증산초등학교 옆으로 난 등산로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군. 우리는 등산화를 조이고 스틱을 팔 높이에 맞추고서 천천히 걸었다. 민둥산 등산로는 힘든 코스와 덜 힘든 코스가 있었는데 덜 힘든 코스는 공사 중으로 막혀있어서 선택할 것도 없이 힘든 코스로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힘든 코스답게 계속 오르막 길이 펼쳐졌다. 이렇게 계속 오르막길인가? 오르고 또 오르기. 걷고 또 걷기. 어느 순간까지 오르다 보면 내려가기도 어렵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잠시나마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하다. 그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조금씩이라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조금씩 가다 보면 어느 순간 트이는 전망을 만나게 된다. 그 전망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가다 보면 하늘과 맞닿은 정상을 만나게 되니까. 아무튼 오르는 일은 정말 힘들다. 운동을 많이 하면 오르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질까? 이번에 하산하면 좀 더 운동을 하리라 다짐하며 나의 땀이 스틱 위로, 흙으로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오르막길이 이어지다가 산길 중간에 휴게소가 있었다. 휴게소는 굳게 닫혀있었지만 근방에 빈 벤치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는 가방이며 스틱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몇 분간은 가만히 누워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오늘 비가 내릴까? 흐린 하늘은 구름 몇 점을 땅 가까이 내려다 놓고 있었다. 이날은 종일 약한 비 예보가 있던 날이었다. 산행 중 비를 만나면 맞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등산을 시작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만 공기 중 수분이 넘쳐흘러 나무와 흙냄새를 진하게 만들어주었다. 빽빽이 숲을 채운 나무들 사이로 올라오는 향기는 백팩을 지고 오르는 힘든 산행의 이유가 되어주는 것 같다.




 그렇게 쉬어가며 오르고 올랐더니 시야가 확 트이면서 넓은 초지가 나타났다. 가을이면 이곳이 황금 억새로 빛나겠지. 빛나는 가을도 멋지겠지만 나는 여름의 민둥산이 참 좋았다. 사방 푸른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에 반하여 걸음을 멈추고 그 싱그러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초록빛 사이로 한들거리던 야생화가 참 좋았다.




 특히나 능선을 따라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 연분홍의 꽃봉오리가 여럿이 모여 피어나던 길초를 만나는 즐거움이 무척 컸다. 초록의 물결 사이에 분홍빛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정상까지 가는 길에 이렇듯 싱그러운 풀과 야생화가 함께 한다면 힘들게 올랐던 순간조차 낭만적인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을 것 같다.


 


 비 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정상에 도착하고 나니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두어 명의 등산객이 우산을 쓰고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갔고 그 뒤로는 우리만이 남았다. 해발 1117미터. 후둑 후둑 떨어지는 가는 빗방울은 바람에 날리며 산아래로 내려갔다. 등산객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자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하늘이 더 짙어지더니 제법 굵은 비가 내렸다. 그럴 땐 텐트에서 가만히 빗소리를 듣는다. 토독토독 텐트를 두드리던 소란한 비가 지나가면 하늘은 잠시라도 맑고 개운한 얼굴을 보여줄 테니까. 가만히 기다리자.




 

 역시 비는 지나갔고 밖으로 나와보니 산 아래 마을에는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내가 있는 곳은 사방 어둠으로 가득 찰 것이고 산 아래 마을은 빛날 것이다. 또한 능선 옆으로 옹기종기 모인 텐트들도 지나간 비에 무탈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산에서 텐트의 불빛으로 서로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도, 이웃 캠퍼들과 나와 옆지기도 결국 모두 별처럼 반짝일 것이었다.


 



 무사히 밤을 보내고 아침 7시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텐트를 걷었다. 밤을 무사히 보내는 것은 잘 자고 아침을 맞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렇게 이른 시간에 기차를 타야 할 때는 하산하는 시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위에 부담이 없는 간단한 음식을 먹고서 일찍 침낭으로 들어간다. 신기하게도 산행의 피곤함 때문인지 이른 시간에 누워도 금방 잠이 들고 만다. 아무튼 우리는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추고 잤는데 알람 소리 한 번에 깨어나 서둘러 짐을 꾸렸다.


 공복의 새벽 산행. 오르막길이 이어졌던 길이기에 하산길은 계속 내리막이다. 하지만 내려갈 때가 더욱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내려가다 체중이 쏠려 발끝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뒤꿈치부터 밟으려고 하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내려가다 다치는 경우도 왕왕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튼 무사히 하산하고 마을로 접어들자 비가 한두 방울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공기 중 물방울들이 한없이 무거워져 곧 굵은 비로 바뀔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하며 부지런히 역까지 걸어갔다. 모자 위로, 배낭 위로, 어깨 위로 떨어지는 안개비가 조금씩 굵어진다.




 이윽고 역에 도착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니 무궁화호가 마침 들어오고 있었다. 떠나오기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바람에 흔들리던 초록과 분홍의 풀꽃들처럼 우리도 민둥산에서 바람과 비를 맞았으니까. 이렇게 가벼워진 몸은 바람을 타고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꼭 그럴 것만 같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이 내가 알고 있던 익숙한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일 것만 같은 느낌. 때론 그런 느낌이 든다. 그리고 열차에 몸을 싣자마자 굵어진 빗줄기가 차창에 와서 부딪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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