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한 겨울 산행
어쩌면 마지막 겨울 산행이 될 터였다. 겨울이 긴 것 같아도 해가 뜨고 지는 일 속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3월을 며칠 앞둔 2월의 끝자락. 천상의 화원이라는 곰배령에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차가운 계절이니 천상의 화원을 구경하기는 어렵겠지만 눈은 실컷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곰배령 산행 준비물에 아이젠이 필수였으므로.
곰배령은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과 마주 보고 있는 점봉산 남쪽 능선에 있는 너른 고개로 철마다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피고 지는 곳이다. 곰배령이라는 지명은 곰이 배를 하늘을 향하고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곰배령까지 가는 숲길은 완만하여 원시림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산행하기 좋다고 하니 트래킹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물론 뽀드득 눈을 밟고 올라갈 각오를 하고서 말이다.
곰배령 트래킹을 하기 위해서는 숲나들이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이 필수다. 곰배령이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었기에 별도의 예약을 통해서만 입산허가를 받을 수 있다. 예약한 날 11시까지 산림생태관리센터에 도착해서 신분 확인 후에 입산 허가증을 받고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12시까지는 강선마을 산림통제소를 통과해야 곰배령을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예약한 사람들 중에서도 늦게 도착한 편이라 등산 초반에는 마음이 다소 급해졌다.
등산 초반부터 하얀 눈이 쌓여있어 길이 꽤 미끄러웠다. 그래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이젠을 착용했다. 아이들 등산화에도 아이젠을 껴주고 나니 만발의 준비를 마친 듯 든든해졌다. 강선 마을 초소까지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산림통제소를 통과했다. 지나고 보니 12시까지 산림통제소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큰 동력이 되었다.
강선마을 산림통제소를 통과하고 나니 다소 여유를 찾게 되었다. 숲에 쌓인 하얀 눈이 얼마나 눈부시게 반짝이는지, 나무들이 눈밭에 묵묵히 서서 하늘을 향해 서있는 모습이 얼마나 처연한지 이런저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봄이 되고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날 때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 다음엔 푸릇한 계절에 여기 다시 오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산행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 배가 고프단다. 우리는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나눠먹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육포도 먹고 딸이 좋아하는 초콜릿도 먹고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니 아이들 바지 하단에 눈이 묻은 것이 보인다. 옆지기는 아이들 발목에 스패츠를 감아주고 아이젠의 상태를 살펴주었다. 그리고 다시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발 1164미터. 곰배령 정상에 올라가니 드넓은 초지가 펼쳐져있었고 그 너머로는 흐린 구름 너머로 설악산 대청봉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에 오를 때는 몰랐던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손이 아린 느낌이 전해졌다. 정상에서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이런 날씨에는 무리일듯해서 정상석 사진을 찍고 정상을 내려왔다.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땐 시원한 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지길, 넓은 초지위에서 하늘거리는 야생화를 만날 수 있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차가운 날씨에 곰배령을 오른 아이들을 격려하며 하산하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수월했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다. 내려가는 길에는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소소하게 눈에 띈다. 눈이 덮인 계곡의 얼음도 올라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계곡을 아이들은 한참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조금씩 녹다가 봄이 되면 하얀 눈과 얼음은 자취를 감추겠지. 오랫동안 겨울일 것만 같아도 조금씩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하산길에 눈에 들어온 것은 고양이였다. 강선마을을 지나 내려가다 보니 예쁜 고양이 한 마리가 사람의 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다가와 아이들 다리에 제 머리를 부비부비 하는 고양이를 보고 아이들은 한눈에 반해버렸다. 다음에 곰배령을 오르게 되면 고양이부터 찾을 것 같다.
곰배령 트래킹을 마치고 나니 푸른 바다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섰을 땐 이미 해가 아름다운 빛을 남기고 지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를 받아 나오며 저녁의 빛들과 잔잔한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겨울의 마지막 산행을 마치고, 어쩌면 이 계절의 마지막일 겨울바다 모습을 마주하니 몽글몽글하고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 따뜻한 커피의 온기가 번져 꽤 근사한 기분이 들었던 하루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이 감사한 마음이 씩씩하게 산길을 올라갔던 아이들에게도 분명 전해졌으리라. 함께 했던 겨울 산행의 조각 하나 그렇게 지니고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기를. 그래. 그렇게 봄을 맞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