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대덕산 백패킹
나는 낭만을 좋아한다. 유년 시절이 떠오르는 오후의 햇살이나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는 꿈처럼 아득한 별과 같이 빛나는 것들. 낡은 일기장이나 그 안에 담긴 소망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바람이나 헤아릴 수 없는 바다와 같은 미지의 세계. 그런 낭만적인 것들. 낭만을 마주하면 펜 끝에 힘이 생겨 비어있던 페이지가 문자로 가득해진다. 낭만 이미지를 그저 쓰고 싶어지고 만다. 그렇게 낭만의 바다에서 유영하는 기분이 참 좋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낭만을 찾아다닌다.
이번 목적지는 대덕산. 우연히 대덕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산그리메 사진을 보고 나니 문득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행을 나서게 하는 동기가 때론 사진 한 장이 된다.
새벽에 도로 위를 달리다 보니 서서히 하늘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둠이 물러가고 붉은빛이 나오면서 하늘은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대덕산은 경상북도 김천과 전라북도 무주 사이에 있는 산으로 서쪽으로는 덕유산이, 남동쪽으로는 가야산이 자리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민주지산이 소백산맥에 함께 솟아있다. 날이 맑으면 정상에서 그 산들이 다 보인다고 하니 산을 오르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들머리는 덕산재로 잡았다. 덕산재는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와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사이에 위치한 백두대간의 고개로 이곳을 경계로 하여 경상북도와 전라북도가 도경계를 이룬다. 높이는 해발 644미터로 해발 1290미터인 대덕산 정상 투구봉까지는 3.5킬로미터만 올라가면 되기에 대덕산을 찾는 사람들이 들머리로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덕산재 주차장에서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고서 등산화를 단단해 조여 맨 후 오랜만에 박배낭을 짊어졌다. 맞아. 이런 느낌이었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 배낭의 무게가 현실이 된다.
등산 초입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정상까지 3.5킬로미터라고 했지만 체감상으로는 10킬로미터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다소 짧은 거리로 정상까지 가는 코스다 보니 경사가 상당했다. 이럴 때는 쉬어가는 것이 최고다. 우리는 집에서 싸온 도시락도 먹어가며 중간중간 쉬면서 산을 올랐다. 행동식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곰젤리를 사 갔는데 힘들 때 하나씩 먹으니 딱 좋았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은 점점 겨울왕국이 되어갔다. 해가 사선으로 비춰 드니 적은 빛을 가지고 사는 응달의 눈은 봄이나 되어야 녹을 듯했다. 오가는 등산객이라고는 오직 우리뿐이어서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와 휑한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이 들리던 산행길이었다.
등산길 초입에 나와있던 안내도에는 정상까지 한 시간 이십분이라고 안내되어 있었지만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계속 산길을 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오늘 안에 정상이 나오기나 할까 그런 의문이 들 무렵 갑자기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이 주변에서는 대덕산이 제일 높은 것 같이 느껴질 만큼 산 아래 풍경이 아득해졌다. 아마도 정상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꾸준히 오르다 보면 늦어도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서두르지 않고 제 속도에 맞춰 조금씩 오르는 일.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정상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정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봉우리와 너른 풍경이 힘들어도 잘 올라왔다고 응원하며 다독여준다.
때로는 산에 올랐을 때 마주하는 모습이 자욱한 안개 속이라 풍경을 조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뿌연 안개 사이로 묵묵히 서 있는 정상석을 마주할 때면 벅찬 마음이 든다. 산을 올라온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이 진하게 번지는 것이다. 물론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 이날은 맑은 날씨 덕분에 가야산, 덕유산, 삼도봉뿐 아니라 이름 모르는 여러 고개와 산들까지 훤히 다 내려다 보였다. 산과 산이 겹쳐서 만드는 그 물결의 아름다움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잊었다.
투구봉 정상에서는 바람이 많이 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남쪽 삼도봉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 보기로 했다. 약 100미터쯤 내려오니 군락을 이룬 억새밭 사이로 헬기장이 있었다. 그곳은 신기하게도 바람도 멈추고 지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어서인지 이른 봄날처럼 따뜻했다. 마침 땀이 식어가고 슬슬 추위가 몰려들어 우모복을 꺼내 입었던 차에 따뜻한 햇살을 받으니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덕산재에서 미리 끓여온 뜨거운 물에 아메리카노 믹스 커피까지 마시니 세상 하나뿐인 전망 좋은 카페가 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백패커 몇 분이 더 올라왔고, 해가 지길 기다려 우리도 슬슬 설영을 시작했다. 너른 자연의 품에 기대어 이렇게 쉬어갈 수 있다는 건 뭐랄까. 꽤 낭만적이었다.
산에서 보는 일몰은 늘 감동을 준다. 땅의 하루를 온전히 빛낸 후에 미련 없이 사라지는 황홀한 빛에 평안과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억새밭 뒤로 덤덤히 지는 해는 무척이나 우아했다. 우리는 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을 했다.
겨울엔 해가 지면 금방 밤이 찾아든다. 특히나 깊은 산에서는 밤이 더욱 긴 것 같다. 해가 지자 바람 방향이 바뀌었는지 바람은 한차례씩 텐트를 흔들며 지나가곤 했다.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저녁을 먹었다. 이날의 저녁 메뉴는 라면애밥. 이는 일종의 전투식량으로 발열체에 찬물을 부으면 열기가 나와 음식을 익혀준다. 아예 보글보글 끓어올라 텐트 안에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 찰 정도였다.
밥 까지 다 먹었으니 이제 별을 체크할 시간이다. 오늘 밤 얼마나 많은 별들을 만날 수 있을까.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텐트 밖으로 나가보았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고 늦은 오후에 올라왔던 백패커들은 투구봉 정상에 자리를 잡았는지 주변엔 우리 텐트뿐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빠르게 별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별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몇 개의 빛나는 별을 만난 것만으로도 무척 반가웠다. 그렇게 별을 만나 주변을 서성이다 차가워진 우리는 각자의 침낭으로 들어가 긴 겨울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주변이 안개로 자욱해 일출을 보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구름 속을 거니는 것처럼 온통 하얀 풍경이 신비롭기만 했다. 이제 다시 배낭을 짊어질 시간. 그렇지. 내 배낭의 무게가 다시 느껴지는 순간이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두고 잠시 동안 가졌었던 하룻밤의 낭만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아름다운 산들의 물결과 일몰, 서성이며 별을 마주한 순간 같은 것들.
이런 낭만에 정점을 찍었던 것은 하산 길에 만난 상고대였다. 지난밤은 상고대가 피기에 적당한 습도와 온도였나 보다. 가느다란 소나무 잎과 억새에 피어난 하얀 눈꽃은 주변을 새롭게 바꾸어놓았다. 덕분에 어제 왔던 길이 아닌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황홀한 상고대처럼 대덕산 정상에서의 낭만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