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선자령 백패킹
그곳은 이미 겨울이었다. 나무는 긴 겨울을 날 채비를 마치고 처연히 섰고 응달엔 하얀 눈이 소복했으니. 그 눈들은 한동안 녹지 않을 것 같았다. 차갑고 하얀 눈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니 들리는 소리라고는 빈 가지를 흔들고 가는 바람의 기척과 부지런한 발자국들의 숨소리뿐. 일찍 겨울이 찾아온 숲은 적막하기만 했다. 돌이켜보니 그 고요의 시간들이 참 좋았던 것 같다. 그렇다. 겨울 숲은 비움과 채움이 요란하지 않아 아름답다.
낙엽이 내어준 길을 따라 대관령 선자령 숲길을 걸었다. 봄에는 작고 연한 초록이, 여름엔 무성한 잎들이, 가을엔 가을의 색들이 이 숲길에 가득했을 것이다. 지금은 숲길을 카펫처럼 덮어주어 고단한 걸음의 안내자가 되었다. 그들은 얼었다 녹았다 하며 쉽게 바스러지지 않고서 그해 겨울 동안 화석처럼 이야기를 모아둘 것이었다.
커다란 풍력발전기와 너른 초원, 날씨가 맑으면 강릉의 바다까지 보인다는 선자령은 백두대간 주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높은 산이다. 산의 해발고도가 1157m로 꽤 높은 편이지만 산행 기점인 대관령 옛길 휴게소가 840m에 위치하고 있어 편도 두 시간 정도면 선자령에 오를 수 있다. 그리하여 두 시간 정도면 눈이 시원해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그 아름다운 겨울 숲에 잠시 기대어 하루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일런지, 하루 머물 박짐을 메고 그런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묵직하던 배낭의 무게가 원래 내 몫의 무게처럼 익숙하게 느껴질 무렵 선자령에 도착했다. 너른 초원은 이미 기울어지는 서쪽 햇빛을 받아 노르스름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햇살이 부셔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청명했던 그날의 날씨 덕분에 바다가 파랗게 내려다보였다. 그뿐인가. 수많은 풍력발전기들이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되어있는 채로 깊은 적막을 깨며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리곤 이내, 이 겨울 숲을 채우는 실로 큰 존재와 마주했다. 그것은 바로 바람이었다.
바람이 이 정도 일 줄은 미처 몰랐다. 바람이 어찌나 세었는지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센 바람이 연신 불어와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얼굴의 온기가 초원으로 날아가버렸다. 장갑 사이로는 미세한 바람이 파고 들어왔고. 간신히 피칭을 하고 텐트 안에 들어가니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텐트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계곡과 산들을 돌아 나오는 가닥가닥의 바람이 초원에서 하나가 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갈변이 된 풀들을 흔들며, 사람을 흔들며, 그들의 바람막이를 흔들었고 높이 떠 있는 구름마저도 빠르게 밀어냈다. 그리고 지는 해를 보여주었다. 산 능선들을 비추던 해가 센 바람에 얼굴을 씻고 그렇게 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졌다.
어두워지자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가져간 소박한 음식을 발열 도시락에 데워 이른 저녁을 먹고 별을 보러 잠시 나갔을 땐 모두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자령 언덕에 얼추 보이는 텐트만 30 여동. 텐트 안을 밝힌 렌턴이 마구 춤을 추며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와서 별을 보던 몇몇은 거센 바람과 추위에 서둘러 들어갔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침낭 속에 들어가 일기를 썼다. 세상에 우리뿐인 그런 느낌. 고립감이 주는 이상한 편안함. 몸은 흔들리는데 신기하게도 정신은 또렷해지는 것 등에 대해 썼던 것 같다. 그러고는 긴 잠을 잤다. 중간중간에 텐트가 날아갈 것만 같은 소리에 몇 번 깨기는 했지만 텐트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잠들었다. 그렇게 새벽이 밝아왔다.
밤새 모두들 안녕하신지. 얼굴도 모르는 이웃 캠퍼들에게 어떤 전우애가 생긴 걸까. 무사한 그들의 텐트를 보고 안심이 되었다. 마음속으로 이웃들에게 안부를 묻고 짐을 정리했다. 그동안 바람은 여전했고 밤새 연무가 가득해진 선자령은 신비롭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등산화를 조이고 배낭을 메고 양 손에 스틱을 들고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 센 겨울 숲에서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어 감사한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