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가기 좋은 금강산 화암사 숲길
아차. 등산화가 안 보인다. 지난봄 흔들바위까지 오르며 다음에는 울산바위까지 한번 가보자 했는데 이번 속초 여행에 깜박하고 등산화를 두고 왔다. 그럼 울산바위를 다음에 올라갈까. 그렇다고 청명한 가을에 등산을 포기하자니 뭔가 아쉽다. 운동화 신고라도 가볍게 다녀올 만한 코스가 있을까?
설악산 북쪽 강원도 고성에는 금강산 최남단 사찰인 화암사가 있다. 화암사는 숲길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유명한데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고 울산바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거기다 푸른 동해까지 조망이 가능한 성인대가 우뚝 솟아있다. 성인대는 옛날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었기에 신선대라고 불린다고도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이길래 신선이 노닐었을까. 오늘 우리는 등산화가 없으니까 조심하며 천천히 올라가기로 하자. 자 다들 신선대의 모습을 상상해봐. 아이들에게 기분 좋은 상상을 건네고 화암사 일주문을 지나갔다.
일주문을 통화하고 걷다보니 매점이 보이고 ‘수바위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수바위에서 성인대 가는 길은 1.2km로 다소 가파른 편이고, 화암사 왼편으로 이어진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거리는 약 2km로 좀 더 긴 반면에 수바위를 지나가는 길보다 덜 가파르다고 한다. 우리는 등산화도 없고 전날 비도 내렸기에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서 두 번째 길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역시 산은 산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역시 숨이 차고 힘든 일이다. 그래도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올레길 매트가 깔린 길을 올라가다보니 근사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힘든데 기분은 좋은 그런 느낌이다.
아이들과 산을 오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게 된다. 등산로의 경사 정도나 정상까지 얼마나 걸릴지 짐작하는 이야기나 땀이 많이 난다는 등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다음 달 중간고사에 관한 부담이나 평소 친구들과의 이야기 등의 이런저런 평소의 생각들까지 조곤조곤 나누게 된다. 이런 순간들까지 지나고 나면 산의 풍경처럼 마음에 남는 것이다. 나중엔 엄마 아빠와 같이 백패킹 가자고 이야기도 해본다. 아이들은 그건 좀 하며 망설이다가도 생각해본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드디어 이정표가 보인다. 성인대까지 500m만 가면 되겠구나. 다들 힘내자. 오르막길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여기서부터 성인대까지는 부담되지 않는 숲길이 펼쳐졌다. 상쾌한 숲의 향기를 맡으며 사부작사부작 걷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산 위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거의 다 왔음을 느꼈다.
저기 바다가 보여. 힘들어도 오길 잘했다! 하늘도 바다 같아.
아이는 성인대 바위에 앉아 동해를 내려다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맑은 날이어서 낮은 산들과 멀리 푸른 바다,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마침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흘린 땀을 데리고 가주고 우리에겐 풍경에 대한 감탄과 감사만이 남았다. 저마다 사진을 찍으며 순간을 담는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뿌듯함을 느낀 아이는 한동안 풍경을 바라본다.
성인대 옆으로는 넓은 암릉이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암릉에 앉아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걸음을 옮겨 신선암으로 가보니 동쪽으로는 동해가 시원하게 보이고 서쪽으로는 울산바위가 웅장하게 펼쳐졌다. 웅장한 울산바위의 모습은 볼 때마다 감동을 준다. 미시령을 지나갈 때 도로 위에서만 보던 울산바위를 이렇게 산에서 마주하니 그 감동 또한 새로웠다.
엄마 내가 뭔가 잘한 기분이 들어. 내려가고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뭐가 뿌듯한 것 같아.
넓은 바위에 앉아 달콤한 포도를 나눠먹으며 딸내미가 말을 건넨다. 힘들었지만 끝까지 산을 오른 뒤에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는 그 말에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때로 산을 오르는 일은 스스로를 믿고 자존감을 키우는데 좋은 것 같다.
바다도 보고 울산바위도 보고 포도도 다 먹었으니 이제 산을 내려가야겠지? 우리는 왔던 길로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이 미끄러워 조심하며 내려갔는데도 내려가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올라갈 때는 거의 2시간 가량 걸린 길이 내려갈 때는 40분도 안 걸렸다.
화암사 입구에 계곡이 시원하게 흘렀었으니 계곡 물 소리가 들리면 거의 다 내려왔다는 뜻이다. 계곡 물에 손을 담가보고 그 청량함을 잠시 느끼고서 산을 내려가는데 나무옹이에서 살고 있는 민달팽이를 만났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한참 들여다보았다. 숲에서 만나는 생명들이 주는 선한 기운을 잠시 느끼고 배가 고파진 아이들은 순댓국을 어서 먹으러 가자고 재촉한다. (설렁탕이나 순댓국을 아주 좋아하는 아이들입니다)
등산 후에는 출출한 법이다. 하산 뒤에 먹는 순댓국의 맛은 역시 꿀맛이다. 우리는 저마다 국밥 한 그릇씩 비우고 추가로 주문한 아바이 순대도 뚝딱 한다. 중앙시장의 순대골목엔 사람들로 붐비고 우리도 사람들 속에서 시장 구경을 하다가 씨앗호떡도 하나씩 더 사 먹었다.
다음날, 척산온천에서 등산의 피로를 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간다.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각자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마시는 시간이 참 좋다. 다음엔 우리 울산바위에 꼭 가보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맞다. 등산화. 등산화부터 챙겨 오자. 그리고 설악산 울산바위 한 번 올라가 보는 거야. 나중엔 대청봉까지도 올라가 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봄이 되면 여기 화암사 숲길도 다시 들러보자. 멋진 풍경에 반하면 다시 찾고 싶으니까. 봄의 화암사 숲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