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백록담을 만나다
이번 여름은 좀 더 특별했다. 3년 만에 찾은 제주. 보름 동안 만난 바다와 오름, 보름 동안 만난 커피와 독립서점, 보름 동안 만난 고양이와 미술관. 그리고 한라산. 그렇다. 한라산이 그 여름 안에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제주에 갔지만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간 적이 없었기에 한라산 등반은 막연히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1950미터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정상의 백록담을 보고 싶었다. 흰 사슴이 신령과 함께 노닐던 연못이라는 의미를 가진 백록담. 한라산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이 호수에는 거의 일 년 내내 물이 괴어있다고 한다. 겨울이면 백록담에 흰 눈이 쌓여 신비로울 것이고 여름이면 파란 호수가 거울같이 빛날 테지.
한라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일단 한라산 탐방예약 시스템에서 탐방예약을 해야 한다. 탐방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백록담을 가는 코스는 관음사 코스와 성판악 코스가 있다. 한라산 북쪽 코스인 관음사 탐방로는 성판악 탐방로와 더불어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을 오를 수 있는 8.7km의 탐방로이며 계곡이 깊고 산세가 웅장하다고 한다. 반면에 성판악 코스는 대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큰 무리는 없지만 탐방 코스 중에서 가장 긴 9.6km로 왕복 19.2 km를 걸어야 한다. 편도만 4시간 30이 걸린다고 하니 하루를 완전히 산에서 보내게 될 것이었다. 어느 코스로 가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거리는 좀 걸리더라도 다소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는 성판악 코스가 아이들과 가기에는 좋을 듯했다.
탐방예약을 마치고 나니 제주에 있는 동안 체력을 길러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해가 뜨거워지기 전 해안도로를 걷거나 달렸다. 운동을 마친 후에는 슬슬 바다가 데워지는 모습을 모며 숙소로 돌아와 시원한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제주에서의 날들이 지나갔다.
드디어 탐방일이 다가왔다. 휴가가 끝나 먼저 집으로 돌아간 남편은 우리에게 각자 2리터의 물이 필요할 거라고 물을 잘 챙기길 당부했다. 그래서 전날 500ml 생수를 12개 사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우리는 각자의 가방에 간밤에 얼린 생수와 간식 등을 챙기고 숙소를 나섰다. 남한 최고봉에 올라간다고 하니 신기하게도 한 번에 일어난 아이들 덕에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새벽의 공기를 마시며 가는 길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운전석 옆에 앉은 아들은 하늘이 너무 예쁘다며 사진을 찰칵찰칵 찍더니 곧 잠들었다. 그래 가기 전까지 잠을 자두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약 한 시간을 달려 성판악 주차장에 6시쯤 도착했는데 이미 만차인 상황. 만차인 경우 제주국제대학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이동해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기에 안내대로 제주국제대학교까지 다시 내려가서 주차를 했다. 주차를 하고 나니 이미 6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고 다시 성판악까지 가려면 한 십오 분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원래 계획은 6시에 바로 등산 시작이었으니 계획보다 한 시간이 늦어지는 셈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못 즐기는 것은 아니니까. 다행히 주차장 길 건너에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는 모르지만 등산 가방을 멘 사람들이 뛰는 것을 보니 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열심히 달려 버스를 잡아타고 한 숨 돌려보니 마방목지를 들러 성판악 주차장까지 가는 버스가 맞았다.
오전 7시. 각자 등산화를 조절하고 산을 오르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탐방 안내판이 나왔다.
사라오름. 여기 정말 아름다웠었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여기 지나서 더 올라가면 백록담이 나오네!
딸내미가 등산 안내판을 보더니 사라오름 이야기를 한다. 딸내미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사라오름을 함께 올랐는데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이곳을 다시 찾게 되다니 우리는 둘 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만 해도 백록담까지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다.
우리 잘 올라가 보자. 가다가 너무 힘들면 내려와도 괜찮아.
한라산 탐방로는 A-어려운 코스, B-보통 코스, C-쉬운 코스로 등산 난이도를 구분해두었다. 성판악에서 속밭 대피소 상단까지는 쉬운 코스였고, 거기서부터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어려운 코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정상까지는 보통 코스였다. 초반에서 속밭 대피소까지는 싱그러운 숲길이 이어졌다. 아이들과 함께 한걸음 한걸음 옮기다 보니 금방 속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대피소에서 좀 쉬기로 했다. 이제 곧 어려운 코스가 이어질 것이므로 물도 마시고 과일을 먹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걸었다.
엄마, 우리 수신호를 정하자.
검지 손가락을 두 번 회전하고 앞을 가리키면 앞질러 가기, 손바닥을 두 번 하늘을 향해 올리면 멈추기 어때?
묵묵히 산을 오르던 아들이 수신호를 만들자고 제안을 해왔다. 정상 쪽으로 올라갈수록 길이 좁아지고 돌이 많아지는 구간이 나타났다. 그런 구간에서는 기다렸다가 뒷사람을 먼저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먼저 올라갈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신호를 하는 것이 좋아 보였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놀이처럼 수신호를 해가며 산을 올라갔다.
이윽고 진달래밭 대피소가 나타났다. 진달래밭 대피소 앞 너른 데크에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우리도 대피소에서 머물며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귤과 방울토마토를 먹는데 옆에 아저씨가 아들에게 씩씩하게 잘 올라왔다며 초코바를 주셨다. 그렇게 당충천까지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이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 같았다. 고도가 높아져서인지 시원한 바람까지 연신 불어왔다.
시간을 보니 9시 50분. (하절기에는 13시까지는 진달래밭을 통과해야 정상까지 갈 수 있다고 하니 시간 안배를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잘 쉬었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잘 왔다고 힘들면 내려갈까 했더니 아이들은 정상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물통이 하나씩 비어가면서 가방이 가벼워지는 것도 재미있단다. 힘들어도 씩씩하게 잘 올라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연신 카메라로 담아보았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주목 군락지가 펼쳐졌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주목은 오래 살고 잘 썩지 않는다고 한다. 산 높은 곳에서 터를 잡고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뜨거운 여름의 빛에도 의연하고 처연하게 서있는 모습이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주목 군락지를 지나 올라가다 잠시 쉬며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멀리 동쪽 바다가 보이고 그 바다에 떠 있는 성산일출봉과 크고 낮은 오름들. 서귀포 쪽으로는 귤 재배 비닐하우스 지붕이 반짝이고 구름이 산 허리에 포근하게 띠를 둘렀다. 이 풍경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시간인지.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면 결코 마주 할 수 없는 풍경이겠지.
주목 군락지를 지나니 너른 초원이 펼쳐진다. 이제는 끝없는 계단의 연속이다. 정상 가까이 온 것 같은데 정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햇빛은 점점 뜨거워졌다. 이럴 때는 자주 쉬어줘야 한다. 데크 계단에 앉아 쉬면서 보이는 풍경이 참 좋았다. 그때 너른 초원 사이로 분홍빛 엉겅퀴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둘러보니 야생화들이 곳곳에 피어있었다. 이 높은 곳에 피어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꽃들이 모두 아름다웠다.
오전 열한시 이십분. 한 걸음, 한 걸음 쉬면서 올라가니 마침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라산 정상석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줄이 꽤 길었기에 우리는 일단 백록담을 먼저 보기로 했다. 정상에 올라가 백록담을 마주한 순간.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시원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고, 파랗고 투명한 호수가 영롱하게 빛나 탄성을 자아냈다. 백록담의 맑은 얼굴을 만나니 내 마음까지도 맑게 세수한 기분이었다.
힘들었지만 백록담을 본 순간 힘든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아.
딸내미가 백록담을 바라보며 속삭인 말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행복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거나 지인들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서 데크나 바위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들, 데크에 누워 햇빛을 쬐며 힐링하는 사람들. 모두가 산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도 바위에 걸터앉아 준비해 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준비해 간 것은 백패킹 가서 종종 먹었던 비화식 도시락 제육볶음 맛과 김치라면 맛이었다. 발열제에 물만 약간 붓고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조절을 잘 못해 설익은 제육 볶음밥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싹싹 비우며 맛있게 먹었다. 산정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먹는 음식은 뭔들 맛있었을 것이다. 간식으로 남은 귤까지 알차게 다 먹은 다음 햇빛을 쬐며 앉아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아이들과 또다시 이렇게 맑은 모습의 한라산 백록담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좀 더 머무르고 싶었다. 내려가야 할 일만 남았는데 쉽게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다렸다가 정상석에서 아이들과 사진도 찍고 백록담에도 한 번 더 올라가 보았다.
시계를 보니 1시. 이제는 진짜 내려가야 할 때다. 백록담을 뒤로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처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온 것처럼 긴 시간을 또 내려가야 한다. 그래도 하산길의 마음은 가볍다. 이미 마음속에 백록담의 영롱한 모습을 담았기에 내려가는 발걸음은 아주 가벼울 수밖에. 거기다 제주섬의 푸른 모습과 구름들, 나무를 눈에 담으며 가는 길은 즐거웠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안 보여.
호기롭게 내려갔지만 끝이 안 보이는 하산길을 걷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아이들도 서서히 말이 줄어갔는데 그때, 숲길 오른편 조릿대 군락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갈색의 귓불이 살랑살랑 움직이더니 폴짝 뛰어서 사라진 그것은 바로 노루였다. 한라산에서 노루를 본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는데 노루가 정말 있었다. 순간이어서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지친 하산길에 만난 선물이었다.
이윽고, 성판악 탐장 코스 시작이었던 매표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려왔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환호했다. 산은 잘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듯 잘 내려오는 것 또한 중요함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 같았다.
매표소 아래에는 성판악 탐방 안내소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정상에서 찍은 사진인증을 하면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우리도 등정 인증서를 발급받았다. 상장 같이 생긴 인증서에는 이름과 등정 일자가 인쇄되어 나온다. 하단에는 백록담 사진과 제주특별자치도 세계문화유산본부라는 인증 도장이 함께 출력되어 나오는데 그것을 받으니 뭔가 벅찬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이 주는 행복은 등산 후 지친 몸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버킷 리스트였던 한라산 백록담 등반을 이룬 것이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아이들과 함께 등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작아 산을 함께 가는 것을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엄마보다 더 씩씩하게 올라가는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과 산이 주는 숭고함과 따뜻한 힐링의 시간들이 어우러져 이번 여름은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이다.
아직도 아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한라산 백록담 사진이다. 한라산 이후 몇 번의 산을 함께 갔었는데 갈 때마다 한라산도 갔는데 여기도 문제없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보면 아들의 기준은 한라산이 된 것 같다.
좋았던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한라산. 그 산의 이름만 불러보아도 행복한 여름의 기억이 소환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