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알프스 백패킹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
산과 산을 이어주는 능선을 따라 해가 질 때까지 걷고
수많은 별을 만나 아득함을 느끼며 잠들고 싶어.
작지만 빛나는 우리의 텐트가
우주를 유영하는 꿈을 꿀 수 있는 곳.
그곳으로 나는 가고 싶어
그곳은 영남알프스였다. 밀양, 양산, 청도, 울주 등 영남 중심에 자리한 산악지대. 산정의 고원이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곳. 울창한 숲과 계곡, 아름다운 수종의 나무들과 자연이 빚어낸 바위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 가지산, 천황산, 신불산, 영축산, 간월산 등의 산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산군을 이루는 곳.
그곳에는 억새 평원이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간월재와 신불재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드넓은 억새밭이 산 위의 바다를 이룬다.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가을엔 좀 더 많은 등산객이 찾는 이유다. 나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햇빛을 받아 빛나는 억새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하지만 거리도 멀거니와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을에 맞춰 백패킹을 나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간절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있으면 기회는 찾아오는 법일까. 마침 여유가 생긴 휴일 새벽, 길을 나섰다. 이렇게 찾아오는 시간은 선물 같아서 여섯 시간이 넘는 운전도 가뿐하게 여겨졌다. 우리는 번갈아 운전을 하면서 등산코스를 열심히 짜 본다.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 - 간월재 - 신불산 - 신불재 - 영축산 - 취서산장 - 지산마을 만남의 광장
등억온천단지에 있는 복합웰컴센터를 들머리로 하고 간월재로 올라가기로 했다. 7개의 산군을 종주하는 데는 2박 3일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박 2일. 거기다 오전 시간은 운전을 하느라 보냈기에 이번에는 간월재에서 신불재를 지나 영축산까지 억새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하산길에는 라면 맛집이라는 취서산장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지산마을로 내려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가 바로 간월재. 말로만 듣던 간월재는 등산길과 임도를 따라 두 시간쯤 걷다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해발 900미터의 드넓은 평원에 펼쳐진 억새가 시원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마음이 두근두근 거린다. 간월재 너른 데크에는 억새를 보는 사람들과 사진 찍는 사람들, 간식을 먹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가 행복해하는 모습 또한 하나의 풍경처럼 편안해 보였다. 우리도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사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산에서 먹는 컵라면은 꿀맛이구나!
간월재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우리는 신불재를 박지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다시 가방을 메고 스틱을 쥐었다. 간월재에서 신불산 가는 길에 촘촘하게 박힌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제법 평평한 계단길이 나타났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둘러보니 사방 트인 능선 사이로 파란 하늘과 단풍을 입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심장은 마구 뛰고 땀은 흐르는데 멋진 풍광에 반해 힘든 것도 잊고 말았다.
그렇게 풍경에 반해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산 능선을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신불재까지는 한 시간 정도 더 걸어야 했기에 해가 지기 전에 마땅한 곳을 찾아 텐트를 치기로 했다.
산정 어디쯤 텐트 피칭을 하고 나니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특별한 말이 필요 없는 시간.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평온한 침묵을 선사한다. 멀리 아득히 보이는 산과 조금씩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해가 지면서 다채로운 색이 펼쳐졌다. 가을 핑크 뮬리 같던 구름이 어두워져 가는 산정의 밤에 낭만을 더해주었다. 낭만과 허기는 가끔 함께 찾아온다. 핑크 뮬리 구름을 보다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가져온 청포도에 스팸 볶음밥, 편의점 편육으로 소박하고 근사한 저녁을 차려본다.
저녁을 먹는 동안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하늘의 달이 밝게 떠올랐다. 달빛에 산 능선이 희미하게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차를 우리기로 했다. 산에서 화기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따뜻한 차가 아닌 냉침으로. 마른 찻잎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연한 푸른빛이 감돌 때까지 기다리며 밤의 풍경을 바라보니 조용한 이 시간이 참 좋다. 이제 수많은 별을 만나 아득함을 느끼며 잠들 차례다. 텐트를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에서 많은 별들이 조용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산 그림자 사이에도 희미하고 작은 텐트 빛들이 반짝였다. 우리도 멀리서 보면 작고 여린 빛으로 보이겠지.
잠들다 깨기를 반복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진한 어둠이 점점 옅어지며 하늘은 어제 저녁 노을처럼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매일 반복되지만 이런 순간은 언제나 특별하다. 맑은 날씨 덕에 늘 품고 있던 곳에서의 일몰과 일출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조금씩 해가 뜨는 동안 우리도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득한 우주를 느끼게 해 주었던 고마웠던 박지였지. 우리는 머물렀던 흔적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신불산 정상에 도착했다. 신불산은 영남알프스의 7개 산 가운데 가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남쪽으로 넓고 평탄한 고원의 능선이 이어진다. 여기도 간월재처럼 억새밭이 펼쳐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길의 억새 평원이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정상석에 신불재까지 데크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신불재 주변으로 드넓은 억새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불재는 원래 1박을 하려고 했던 곳이다. 여기도 간밤에 여린 텐트의 빛이 반짝였겠구나.
신불재를 지나가는데 바람에 사각이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억새의 노래를 들었다. 이른 아침의 노래였다. 억새는 여리지만 흔들리며 하나의 계절을 만들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억새숲 사이로 용담초와 구절초가 피어서 함께 노래하는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멀리 보이는 언덕이 영축산 정상이다. 영축산에 가까워질수록 사람 키만큼 높이 자란 억새가 등산길에 벗이 되어주었다. 오직 키 큰 억새뿐이다.
신불재에서 한 시간 가량 걸었을까. 하늘 억새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영축산 정상에 이르렀다. 영축산은 정상의 바위가 꼭 독수리 부리처럼 생겨 유래한 지명인 취서산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바위를 바라보니 고원 위에 우뚝 솟은 바위가 파란 하늘 아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듯 강렬한 독수리의 부리 같아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이 저 아래 보였다. 걸어올 때는 꽤나 숨이 차고 힘들었는데 돌아보니 그 길이 짧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잠시 에너지바와 물을 마시며 영축산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정상에서 잠시 쉬었으니 이제는 내려가야 할 때다. 하산길에 있다는 취서 산장에서 아침을 먹을 계획이었기에 내려가는 길이 너무나 가볍다.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하고 감이 아쉬울 법도 하지만 라면 맛집이라는 취서 산장에 어서 가보고 싶은 마음에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갔더니 파란 지붕의 취서 산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왜 여기가 라면 맛집인지 바로 이유를 알아챘다. 컵라면이 다 같은 맛 아니겠어 할 수도 있지만 이곳 컵라면은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말미암아 더욱 특별해진 것이다. 산 아래 풍경을 시원하게 바라보며 먹는 컵라면의 맛이란!
취서 산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 진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크고 단단한 소나무가 숲길 곳곳에 있어 솔향을 맡을 수 있었다. 하산길 경사가 상당해서 발에 힘을 주고 내려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지만 향긋한 솔향에 힐링되는 기분이다.
힐링 : 정신적 · 신체적 상태가 회복되는 것으로서 치유(治癒)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이틀간 영남알프스에서 보낸 시간 모두 힐링이었다.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영남알프스에 와서 해가 질 때까지 걸었고, 아득한 우주를 유영하듯 고요한 별빛을 받으며 잠이 들었지. 그리고 아름다운 억새의 노래까지 들을 수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이 힐링이자 가을의 선물 아니겠는가.
좋은 기억은 좋은 시간을 데리고 온다. 다음에도 영남알프스에 올 수 있겠지. 그때는 다른 코스로도 억새를 바람을 별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