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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작쟁이 Dec 04. 2021

놀이로써의 글쓰기

#2 한 시간 매일 쓰기

글쓰기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까지 일기처럼 낙서처럼 매일 쓰기로 했다.

머리를 쥐어짜 내 봐야 대단한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일종의 테스트처럼 시도하는 글쓰기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나는 늘 그랬다.

의미가 담기지 않은 행동은 지속할 수가 없다.

그 의미라는 것이 매우 주관적인 탓에 '진심으로' 우러나오지 않으면 크기와 상관없이 '없는 것' 취급당하기 일쑤다. 그 의미는 진중하고 심지어 진심이기까지 해야 했다. 아 무겁다 무거워.


나를 무겁게 만드는 것들 중 9할은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환경 탓인지 태생이 그런 것인지 나는 유독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많다.

누가 언제 정해둔 것인지 알 수 없는 행동강령이 사전에 빼곡하다.

최근에는 그것들에 '왜?'를 붙이기 시작했다.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장들에 사로잡혀 여태껏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은근히 억울하다. 내가 끌어모아 둔 데이터베이스를 하나하나 헤집어 그것의 출처를, 이유를 되짚어보는 것을 반복했다. 조금은 가라앉은 상태로.


심해를 떠다니는 것과 땅바닥에 묻히는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나는 자주 바닷물에 처박혔고 가끔 땅을 파고 쪼그려 앉았다.

물속에서는 잠깐 기운을 내어 팔다리를 버둥거리면 수면 위로 코를 내놓을 수 있다.

물론 온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으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땅 속에 묻히면 상황이 조금 다르다.

거기에서 나오려면 행운이 필요하다. 

그 행운들이 모일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때그때 다르다.

우선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은 그 땅바닥이 파헤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는 기민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손이 흙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물 속이든 공기 속이든 바닥에 발이 닿으면 차 오를 수 있지만

스스로가 그 바닥이 되면 자신을 잃는다.


이 세상에서 여자로, 엄마로, 아내로, 딸로 살다 보면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나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

역할로서의 나와 개인의 나를 분리하려는 시도를 종종 해보는데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사회에서 부여한 역할로서의 자아와 개인의 자아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일이다.

이것을 완벽히 분리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사고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야말로 애를 쓰는 수준이다.

내가 얼핏 고집쟁이 같아 보이는 것도 사실은 높은 수용성을 가진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꽤나 휘둘리기 때문에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크다. 한 마디로 귀가 얇다. 

그것을 피하는 수단으로 '회피'가 두드러진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회피를 이기는 일은 내 오랜 숙제가 될 것 같다. 

어쩌면 내게 '쓰는 일'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별 것 없음'이 드러나는 두려움도 이 기회에 떨쳐내 버려야지.


나는 겁이 많고 걱정이 많고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대안에 대안을 만들고 그것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쓰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게 되겠지.


그저 놀이로써의 글쓰기라고 우선은 정해두자.

어쨌든 즐거우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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