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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 마음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어른이지만, 아이입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성인아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몸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이 자라지 못한 사람들을 성인아이라고 한다. 성인아이의 개념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 스스로 성인아이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성인아이가 되었을까? 왜 마음이 어린 상태로 성장하지 못했을까? 유년시절의 기억과 내 어린 시절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서 내 마음이 자라지 못한 이유를 조금씩 캐내어보고 있다. 


과잉보호가 몸만 큰 아이를 만들었다

엄마는 나를 몹시 정성껏 키우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 유산이 되었던 터라 나 역시도 잃을까 걱정이 되셨다고 한다. 링거를 여러 차례 맞고 겨우겨우 낳은 아이가 나이다. 이렇게 첫 아이를 낳으니 엄마의 기본 감정은 불안이었다. 원래도 불안이 기본모드인 엄마의 삶에 이 아이가 남편에게 사랑받을지도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낳은 딸이 열아들 못지않게 자랑스럽기를 바랐다. 그리고 열정 넘치는 엄마주도적 육아를 했다. 아이를 끼고선 금이야 옥이야 길렀다고 한다. 손을 잡고 걷다가 넘어지면 즉시 일으켜 세우고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씻겼다. 엄마는 나를 보호하기를 과잉으로 했다. 그래서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선택권'이었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실패할 수 있는 자유

결혼하고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엄마가 임부복을 사 오셨다. 엄마의 선물이었다. 감사히 받고 입었지만 지나고 나니 아쉬운 마음도 든다. 왜냐하면 그 임부복은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동생과 함께 시장에서 산 임부복은 어둡고 칙칙하고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3벌 중 바지 한벌은 그나마 나았지만 나머지 원피스형인 두벌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내가 마음에 드는 임부복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엄마가 3벌이나 사주었는데 그냥 입으면 되지 굳이 내 마음에 드는 옷을 더 사야겠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엄마가 앞서서 내 인생을 진두지휘해 나간 덕분에 나는 나 스스로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엄마가 이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나를 위해 선물을 했는데 나는 못마땅해하고 있다니, 이렇게 나쁜 아이가 있나 하는 마음이다.


'너를 위해서'라는 덫

엄마는 언제나 앞서서 지시했고 정답을 말했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 주문을 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엄마의 레이더 안에 있었고 엄마는 모든 것을 알고 관여하고 간섭을 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다는 인식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줄 알았고 크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엄마는 여전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아이를 키우는 것, 집을 사는 것, 시댁과 부부관계 등 모든 것을 엄마의 뜻대로 지시했다. 내가 싫은 내색을 하면 엄마는 말했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너 잘되라고 하는 거지."


엄마는 내가 첫 집을 장만하자 오셔서 방마다 소금과 팥을 뿌렸다. 내 종교가 기독교인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다 나 잘되라고 나를 위해서 한다는 것이었다. 이사도 손 없는 날로 잡고 원치 않는 신년운세도 묻지 않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언젠가는 어느 점집에 갔더니 사위가 건강이 안 좋아 일찍 죽는다고 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남편이 요절할 것 같은 두려움과 걱정과 슬픔에 마음이 무거웠다. 귀를 씻고 싶었지만 엄마는 자기 말하고 싶은 대로 거침없이 말을 뱉어냈다. 그게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남편은 여전히 끄덕 없이 잘만 살아있다. 나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행동했던 엄마는 지금도 추호의 반성이 없으시다. 너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했고 헌신했는데 몰라주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미처 크기 전에 먼저 역할을 덧입었다

나는 장녀였다. 어린 시절 늘 '동생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 첫째가 잘하면 동생들이 다 보고 따라 배운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모범이 되어야 하는, '~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밑의 동생이 두 살 터울이고 막내와 나는 열 살 터울이니 생후 2세부터 나는 '아기'인 나 대신에 '맏이'인 나로 살아야 했다. 

때로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순간들도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부모님은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첫째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면 첫째가 피아노를 배워와서 동생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셨다고 한다. 그때 내 나이 열 살 남짓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성격에 맞지 않는 장녀로 평생을 살았다. 


돌보지만, 감정을 나누지 않는 엄마

엄마는 소위 억척이다. 일을 하면서 4남매를 키웠으니 얼마나 할 일이 많았을 것인가. 늘 분주하고 늘 많이 일이 산적해 있었다. 남들은 갱년기 운운할 때도 엄마는 잠 좀 푹 자봤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졌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엄마가 우리를 참 정성껏 키웠다고 생각했다. 고맙고 감사하다고 여겼고 나는 사랑받으며 잘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서 엄마가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고 대학생이 되니까 집을 떠나고 싶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이렇게 헌신적인데, 너희들 공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키워내주셨는데 나는 왜 집을 떠나고 싶었을까.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육아라는 일을 했지만, 마음을 주지 않았음을.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가르치고 많은 일을 과업형 엄마로 해냈지만 내 마음은 정작 엄마에게 수용받지 못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엄마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나의 감정을 엄마와 도란도란 나눌 수 없었다. 엄마는 바쁘거나, 해결책을 지시하거나 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받았던 것은 기대와 푸쉬였지 수용이 아니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덮여버린 감정이 어른이 된 지금도 쓸쓸하게 가슴에 일렁인다. 내 마음속에 그런 내가 불쌍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내 연민의 감정은 거기서 출발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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