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나를 키우며 산다
엄마의 불안이 큰지 작은지 어릴 때는 잘 알지 못했다. 자라면서 엄마는 좀 욕심이 많고 억척이라고 생각했다. 약간 별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엄마는 무척 불안한 사람이었다. 걱정이 많고, 잃을까 두려워했다. 노심초사하고 손해보지 않으려 기를 썼다. 그런 엄마의 큰 딸이었던 나는 어떻게 마음을 형성해 왔는지 돌아보고자 한다.
엄마에게 나는 첫 번째 임신이 아니었다. 아빠와 연애결혼을 했는데 엄마도, 아빠도 모두 시골에서 상경해서 객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아빠는 작은 이발소를 하고 있었고 엄마는 이발소에서 일을 했었다. 결혼을 했지만 가진 것 없는 청춘남녀는 아직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다. 좀 더 돈도 모으고 자리도 잡히면 애를 낳자고 첫 번째 아이를 유산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는데 그 아이가 자연유산이 되어 버렸다. 자연유산은 엄마에게 긴장과 위기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임신이 된 아이가 바로 나였다.
이 세 번째 임신 또한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셋방살이를 하고 있던 부모님은 집에 수도시설이 없어 멀리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고 했다. 물 한 동이를 들고 오면 하혈을 하기 일쑤였고 그럼 집에서 링거를 맞고 겨우 몸을 추슬렸다고 했다. 그렇게 위태위태한 임신기간을 지나고 출산예정일이 다가왔다. 엄마는 이 아이를 잃게 될까 몹시 걱정했었다고 한다. 산부인과에 적지 않은 돈을 깨 먹고 겨우 낳았다고 했다. 그 뒤에 둘째는 집에서 나머지 동생들도 조산소에서 낳았으니 첫째인 나만 병원에서 돈을 많이 들여 낳은 셈이었다. 출산 또한 쉽지는 않고 제법 난산이었다고 했다. 오랜 진통 끝에 겨우 아이를 낳고 출혈이 멈추지 않아 큰 병원으로 옮겨지기 직전 구사일생으로 어찌어찌 살아났다고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태어나 엄마 품에 안긴 아이. 엄마는 아이가 태어나서 한시름 놓긴 했지만 정작 엄마의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안한 엄마는 나를 아빠 옆에 밀어놓고 아빠 눈치를 살폈다고 한다. 아빠는 처음에는 딸아이라고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이가 방긋방긋 웃고 하니 눈을 맞추고 귀여워하더라고 했다. 나중에 자라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빠 앞에 누워있던 아기인 내 모습이 연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던 아빠의 모습과 그런 아빠를 신경 쓰며 지켜보던 엄마도 모습도.
엄마의 핵심감정은 아마 불안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내가 낳은 아이를 좋아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엄마는 불안했던 거 같다. 아들이 아닌 딸아이라는 점이 엄마의 원초적인 불안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후로 엄마는 내리 딸 셋을 낳으며 자신의 입지와 존재에 대해 극심한 불안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다. 아들 낳기에 대한 시댁의 압박 또한 엄마를 몹시 괴롭혔다. 그 첫출발이 된 것이 첫째 딸인 나의 출생이었다.
가끔 엄마는 회상을 하며 잃어버린 첫째 둘째 아이가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면 어쩌면 내 운명은 오빠가 둘 있는 여동생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딸 셋, 막내아들인 사 남매네 장녀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일 거 같아서 나는 평생 오빠들 밑에 여동생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맏이 역할, 살림밑천인 큰 딸 역할 하는 것이 버거울 때마다 야속한 운명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어떤 부모와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사실은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계획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나는 우리 가족이라는 원형을 내 운명으로 받아 태어났고 이제 중년의 삶에 이르러 그 뜻하심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자라지 못한, 조금 천천히 자라고 있는 내 안의 아이를 위로하고, 함께 자라고 있다.
나는 이제 갓 태어난 갓난아이인 나에게 편지를 써 본다.
아가야, 세상에 나오느라 많이 힘들었지?
태어난 것을 환영한단다.
너무나 예쁘고 소중한 아가야,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고 돌봐줄게.
너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네가 처한 환경이 완벽하진 않을 거야.
때론 힘든 부분도 있겠지.
그래도 나는 네가 잘 자라서
삶의 깊이 있는 어느 지점에 이를 것을 알고 있단다.
너의 눈빛과 얼굴이 참 사랑스럽구나.
네가 여자아이인 것이 참 기쁘단다.
네가 첫째 아이인 것도 정말 기쁘단다.
사랑스러운 아가야,
부디 네가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