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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봄날 아침편지23

2024.5.11 이성복 <꽃피는 시절>

by 박모니카

사월의 봄님이 그냥 가지는 않았나봅니다. 지인들이 보내는 톡에는 오월잔치로 흥겨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네요. 대학가에는 대중가수 콘서트, 지역엔 꽃잔치, 가정의 달에 맞는 갖가지 행사들이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이런 행사가 없는 말랭이에는 그만큼 사람들이 덜 오겠지만, 오히려 저는 이런 고요와 평화가 참 좋습니다. 책방에서도 저 멀리 번져오는 초록내음에 킁킁거려보다가, 원두커피 한잔 마시기도 하다가, 복실이랑 햇빛아래 발가락 장난도 해보구요. 그렇다고 무조건 놀기만 한 건 아니지요. 곧 출간할 에세이집 수정도 하고, 희망도서분류도 열심히 하고요. 그러다가 만난 시집 한 권,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이었습니다. 바다와 여름을 잇는 시 중에 이 시인의 <서해>라는 시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아직 여름이라 부르기엔 제 마음엔 아직도 봄물이 찰랑거려서, 시집을 설렁설렁 보던 중 어떤 느낌이 훅 오는 거예요. 너무 오랜만에 존대어가 가득한 시집을 읽은 거지요. 사실 요즘 시들은 시어의 표현도 너무 가볍게 올려지기도 해서 독자로서 아주 때때로 서운할 때도 있거든요. ^^ 이 시집을 읽다 보니 왠지 근대시인 두 사람이 떠올랐어요. ‘김소월시인’과 ‘한용운시인’이예요. 물론 시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제가 그냥 떠오른 느낌일 뿐이지만요. 그래서 제가 좀 더 젊었었더라면 ‘문학 평론분야에 대한 공부도 하고 싶다’라는 몽상에까지 다다르지요...^^ 하여튼 이성복 시인의 시집 한 권을 잘 읽었습니다. 읽고 나니 왠지 따뜻한 누군가가 곁에 가까이 있는 듯, 멀리 있는 누군가가 그의 그리움을 보내준 듯한 그런 감정들이 울렁거렸지요. 오늘은 이 시를 들려드리고 싶네요. <꽃피는 시절>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위실나무꽃
경탄산사
작약
흰 매발톱
연미붓꽃

<모든 사진은 박선희 작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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