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8
'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당신에게' 차려준 맛있는 시 밥상.
EBS FM <시 콘서트> 방송작가이자 동화작가인 정진아 작가는 어떤 맛있는 밥상을 내 왔을까 궁금했다.
블러그의 한 이웃이 추천도서로 소개해서 바로 지역의 희망도서 대출을 신청하려는데, "아니지. 이 책은 가지고 있으면서 종종 읽어야 겠다"싶어서 책을 구매했다.
목차를 여는 순간 작가는 말했다.
"따뜻할 때 드세요. 당신을 위한 맛있는 시. 마음대로 아무때나"
책 제목 그대로 먹거리를 담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추장, 된장, 간장, 설탕 등의 식재료를 표현한 시부터 삶의 다채로운 스펙트럼과 함께 동행하는 별의 별 맛난 음식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정말 다르구나. 시인에게는 정말 하찮은 것이 없구나 싶었다.
삼학년 - 박성우 - (P.38)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러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앗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빠귀를 첨으로 맞았다
이 삼학년 어린이가 시인이 되었단다. 이런 상상력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걸까. 시인은 정말 타고 나는 듯, 코믹한 성정도 타고난 듯.
숟가락은 숟가락이지 - 박혜선 - (P.48)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밥상앞에 놓고 텔레비젼 보던 할머니가 한마디 한다
그냥
밥 잘 뜨고
국 잘 뜨면
그만이지
박 푹 떠서 김치 척 걸쳐
입 쩍 벌리는 할머니
요 봐라 요기,
내 수저는 시집 올때 가져온 꽃수저다.
언젠가 부터 세상에 나타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계단. 그 옛날에는 이런 계단 없이도 누구나 곱디고운 꽃수저 들고 밥 먹고 잘 살았는데.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나는 어떤 수저를 가지고 있는거야?" 라고 물어보지 않는 것 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오네.
콩밥 먹다가 - 정다혜 - (P. 60)
- 딸아이에게
저녁밥 짓는데 넣으려는 검정콩 한 줌
물에 불렷는데도 단단하다
어디 단단한 슬픔이 있던가?
중 략
아이는 그해 여름 길 위에서
콩 꽃처럼 피었다 떨어졌다
무심히 콩밥 담는 저녁밥상에서
다시 만나는 검은 화인
여태 너 나하고 살고 있었니?
내 안에서 너 콩 처럼 살고 있었니?
너 묻고, 나는 평생 콩밥 먹는 죄인이었는데
너 묻고, 나는 평생 콩밥 먹는 슬픔이었는데
시를 읽는 동안 맘이 아팠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다혜 작가는 누구일까? 궁금해서 검색창을 올렸다. 너무도 아픈 사연에 창을 내리고 작가에게 맘 속 기도를 했다. 시를 들려주어서 고맙다고.
상처를 치유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냐고.
가을 햇볕 - 안도현 - (p.116)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시인 안도현처럼 그 흔하디 흔했던 '연탄재'를 잘 표현한 시인이 있을까 라고 늘 생각했다.
가을 햇볕에 말리는 빨간 고추가 고추장이 되고 사랑이 되기까지 인생의 매운맛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표현한 시인이 있을까를 또 생각했다.
밥 - 천양희 - (P.150)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살아 있어야만 할 수 있다. 그 무엇이든지.
사랑도 이별도, 즐거움도 외로움도,
잠듬도 깨어남도, 웃음도 울음도.
꼭꼭 씹어 먹을 힘만 있다면 세상은 살 만 한 가치가 있는 법. 그러니 제일 맛있는 것은 '밥' 뿐이다.
<맛있는 시>에는 총 4장으로 구성 되어 있다.
제 1장, 위로맛 시
제2장, 사랑맛 시
제 3장,인생맛 시
제 4장, 엄마의 맛 시.
어느 하나 맛 없는 시가 없다. 다 맛있다. 꼭 꼭 씹어 먹으면 더 맛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