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舊製)가게에 들어서서 오래된 아름다움을 구제(救濟)해볼까. 여름 장마철이 오기 전에 덜 입게 될 옷, 누군가가 입을 수도 있을 옷을 내놓으며 이들의 운명을 생각해봅니다. 얼마전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 앞에 종종 서는 분께서 시원하게 녹음진자리 같은 초록원피스를 입으셨더군요. 모두 예쁘시다고 전하니, 그분의 살포시한 미소가 더욱더 환해졌습니다. 마치 큰 언니의 품처럼 제 손을 잡고 그 원피스를 구한 집으로 구경가보자 해서 따라가니, ‘구제(舊製)천국‘이란 곳이더군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지요. ’그렇지. 이분은 이럴 수 있지. 무슨 옷을 입어도, 그녀의 덕성으로 다시 탄생하는 옷들이지.‘ 라구요. 이런 글도 쓰셔서 보여주셨지요.
버림받았다고 해서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패자부활전에서 겨우 살아남아
소각장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오늘도 무심하게 버려지는 것들 사이
수거함 눅눅한 생에서도 천국을 꿈꾸는 것들이 있다
-<구제천국> 중에서-
자본주의는 소비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지요. 비싼 브랜드의 상품들도 팔리지 않고 남겨지면 자기들만의 가치를 위해 다 태워버린다는 세상. 하지만 제 나이만 해도 머리에 새긴 절약이라는 단어가 살아나와, 돈 한 푼 있으면 저금하고, 옷 한 벌 가지고 몇 년을 입고, 그릇 한 점으로 몇 십년 음식을 대접하는 법을 알지요. 무엇이든 함부로 버릴 수가 없어서 쌓이고 또 쌓여 이사 가지 않으면 변화를 줄 수가 어렵습니다. 일부러라도 어떤 꼬리표를 달아서 오래된 물건들의 길을 찾아주어야 하지요.
오늘은 제 16년된 차가 운전대를 마지막으로 맡기는 날입니다.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 마전 200만원 이라는 거금을 주시며, ’돈이 작아도 차 한 대라도 사는데 써라’ 하셨지요. 저는 제 분수에 맞게 작은 차를 사서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요. 큰 사고 한번 없이, 학원생들을 모시면서, 제 살림살이를 조금은 더 여유롭게 해준 가장 큰 동반자였습니다. 중간에 다른 차 한 대가 생겼지만, 첫정이 무섭다고, 늘 저나 남편의 맘속에는 요놈에 대한 정이 돈독하지요. 이제 정을 떼려니 뭔가 저 밑바닥에서 ‘움틀한 것’이 한 줌 올라오네요. 셔츠 하나 따로 떼어놓기도 쓰라린데 하물며 제 손과 발이 되어준 저 차야 말로... 이제는 이 차를 구제할 수 없으니 진짜 이별을 해야될 것 같아요. 정호승 시인의 <택배>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