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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봄날 아침편지138

2024.9.3 류시화 <구월의 이틀>

by 박모니카

여자와 남자는 그 힘이 확실히 다른가봐요. 지난 7월초까지, 감자알을 캐고, 중간중간 오이 몇 개 고추 몇 개 따 먹다가, 특별히 기억할 만한 멋진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손바닥만한 텃밭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습니다. 밭을 쓰라고 하신 지인 왈, ’잡초 좀 뽑아야, 무 배추씨라도 심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뽑아먹지‘ 라고 서너번 들었건만, 이런저런 핑계대고 한 여름이 다 가버렸지요. 어제는 마침내 맘의 갈퀴를 들고 밭을 찾았습니다.

’아이고야, 세상에나...‘ 완전히 밭을 덮고 있는 풀들은 마치 초록이끼로 덮은 갯바위동산 같더군요. 비도 한 두 방울 내리길래, 풀들이 잘 뽑히겠지 싶었는데, 어찌나 심지가 깊은지 꼼짝도 안하더군요. 둘러보니, 이름도 모르는 농기구 하나 들고, 긴 치마 펄럭이며 풀들을 긁어내다가, 괜히 화가 나고, 빗물이 눈물, 땀물이 되어 흐르고... 결국은 포기했습니다. 밭을 빌려준 지인에게 사정을 말하려고 갔는데, 눈치빠른 지인은 땀 범벅으로 나타난 저를 보고, ’먹을 복도 많네. 어서 점심이나 먹어라‘ 라며 토종닭 국물에 영양밥을 말아주고 갓 담은 파김치, 가지볶음을 주시더군요. 밥을 먹으면서 화도 풀리고 서글픔도 사라져서, 다시 도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요!!! 다른 건 몰라도 빌려준 이에게 원상복구로 맨땅을 보여줘야 사람 사는 도리지 싶어서요.

세상 그 어떤 일이 손 없이 이뤄지는 일이 있을까요. 천양희 시인의 시 <그 사람의 손을 보면>에서 말하길, 구두 닦는 사람은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나게 하고, 창문 닦는 사람은 비누 거품 속에서도 빛을 나게 하고, 청소하는 사람은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나게 한다고 했지요. 또 마음 닦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을 낸다고 했는데, 하물며, 남의 땅에서 수확을 하여 배를 불린 자가 그 땅의 빛을 밝혀주는 부지런한 손을 가져야 되겠다, 기도했답니다. 오늘도 9월시 하나 소리내어 읽고 마음을 정련하고 밭으로 가볼랍니다. 류시화시인의 <구월의 이틀>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구월의 이틀 – 류시화


소나무숲과 같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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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텃밭갈이2.jpg

<사진제공,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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