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4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약속(約束)’ 두 글자가 양쪽 팔뚝에 우뚝 솟아, 마치 알통처럼 보입니다. 연이틀 만난 텃밭에는 나무도 아닌 것이 뿌리는 천갈래 만갈래 길을 내고, 고목으로 승천하려는 이무기처럼 한 줌의 땅덩어리를 움켜쥐고 뽑힐 줄 모르는 풀들의 반란... 전쟁이다. 누가 이기는지 보자. 호미 한 자루에 목숨 건 듯, 깊이 더 깊이, 땅을 파헤치며, 얽히고 섥힌 땅과의 인연을 끊어내보려는 저의 의지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엉덩방아를 찍게 하길 수십 번.
아침7시부터 시작된 풀제거 작업. 일어났다 섰다 하기에 무릎이 너무 아파, 뽑힌 장대풀을 방석삼아 엉덩이로 밀고 다니길, 세 시간... 어느 해던가요, 한라산 백록담 한번 가보자고, 신발도, 물도 제대로 된 준비없이 나섰다가, 결국 백록담 도달 1시간을 앞두고 포기하며 마지막 쉼터에서 대(大)자로 누워버렸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풀과의 사투였네요.
그놈의 ‘약속’이 얼마나 무섭길래, 내 마음은 이렇게 제 몸을 함부로 내동댕이 치는가도 생각했다고, 아니지, 약속을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지, 그래야 사람이지.. 라고도 했다가. 마음속에 갈등(칡과 등나무)으로 수백 번 넝쿨을 만들면서, 결국은 어린 나무만큼 뿌리내린 장대풀들을 모두 뽑았습니다. 산에 오를 때처럼, 멀리 바라보지 않고, 바로 제 발 앞에 놓인 풀들만 바라보며, 한 줌 한 줌 땅의 얼굴을 드러내주니, 지렁이, 개미, 이름 모를 벌레들이 손 위를 장식했죠. 그래도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그렇게 제초기처럼 움직이고 결국 약속을 지켰습니다.
땅 빌려준 지인에게 전과 후의 사진을 보내줄 때도,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온몸이 땀 바다에 담겨 있었는데요. 돌아오는 길, 어느 하얀 집 담벼락에 얼굴 내민 능수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운전대가 제멋대로 갔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참으로 힘들었어요. 하지만 약속을 지킨 마음만은 저 하늘 푸른 창공에 둥둥 떠다니는 흰 구름처럼 자유롭게 헤엄쳤습니다.
풀밭에 살았더니, 제 몸에 풀독이 올라 당분간 제초의 노고를 잊지말자, 공생하자 하고, 손가락부터 양 팔까지 가렵고 에려서 오늘 이 편지글도 처음으로 목소리를 문자로 바꾸는 앱을 쓰고 있답니다. 날 밝으면 바로 피부과부터 가봐야할 것 같군요. 지금까지 풀과의 사투 2탄 스토리였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아는지, 화장품 견본 상자에 써있는 문구 하나가 저를 위로하며 이 새벽을 맞으라 하네요. ‘The great things never come from a comport zone.“
박노해시인의 <가을볕이 너무 좋아>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가을볕이 너무 좋아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비춰오는 살아온 나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