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2 문현미 <쌀에서 살까지의 거리>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 들어간다.’
소설 <흰>에서 한강 작가는 말했어요. 날카로운 모서리 위, 벼랑의 가장자리 같은 시간에서 앞으로 우리는 나아가는 거라고요. 가을 색이 점점 물 들어오는 시월에 찾아온 노벨문학상 낭보는 단순히 문학인들만의 잔치가 아니었어요. 엔터 문화층이 주도하던 한류 문화(K 문화)의 최고 탑 위에 흔들리지 않을 또 하나의 강력한 중심 탑이 되었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의 위력을 아름답게 심어놓은, 아마도 제 평생에 다시 들을 수 없을 기쁜 소식이어서, 어제도 오늘도 맘이 정말 행복합니다.
어제는 왠지 들뜬 맘에, 친정엄마께 전화를 드렸죠. 얼마 전 지인이 준 늙은 호박이 있었는데요. 지인 왈,‘ 엄마한테 호박죽 쑤어드려라’. 하지만 불행하게도 제가 직접 호박죽을 쑤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아, 잘 됐다. 엄마한테 한강 작가가 누군지, 어떤 상을 받았는지도 알려주고, 호박죽 쑤는 법도 배워야지’
하며 친정에 갔지요. 금요일 수업 전까지의 시간은 오롯이 엄마와 함께 하는 주문을 걸면서요.
그 사이 엄마는 쌀가루와 팥을 준비하고 기다리셨죠. 호박 갖고 온다고 해서, 하도 바쁜 사람이라 새벽부터 일찍 와서 배울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데요. 중요한 것은, 제가 그 두꺼운 호박껍질을 벗기고 조각을 내는데, 손이 꽤 아프더군요. 새알까지 만들고 호박죽을 완성해서 먹기까지 약3시간.^^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친구분들과 함께 죽을 드신 일은 더욱 좋았어요. 모두 진노란 호박죽을 큰 대접으로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참말로 평화로웠습니다. ‘딸내미 육십 평생에 처음 호박죽 얻어먹었다.’라고 친구분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칭찬이신지 자랑이신지 헷갈렸긴 하지만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저도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상을 매일 겪어요. 그런데요, 알지 못해서, 살아본 것이 아니라서, 정해진 삶의 모습이 아니라서 재미있나 봐요. 제가 생각해도 하루에도 수없이 예측 못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아마도 아침편지의 소재를 끊게 하지 않으려는 신의 선물일까요? ^^ 문현미 시인의 <쌀에서 살까지의 거리>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쌀에서 살까지의 거리 - 문현미
말끔하게 마당질한 알곡에
언틀먼틀 불거진 한 생의 부스러기를 섞는다
표정 없는 일상의 손에 휘둘려 농부의 피살이
땀과 눈물과 애간장이 부옇게 씻겨져 나간다
살아 있는 자음과 모음의 배반을 꿈꾸며
먼지 풀풀 날리는 하루를 지탱해 줄 밥솥 안으로
땅의 경전을 집어넣는다
작은 우주 안에서 불, 물고문을 견디며
기꺼이 우리들의 더운 피가 되어 주는
한 톨의 쌀
나도 누군가의 입안에서 달콤하게 씹힐
저녁 한 끼라도 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