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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Oct 31. 2024

당신봄날아침편지196

2024.10.31 황동규 <시월>

아직도 동이 트려면 좀더 기다려야 될 듯, 컴컴한 어둠이 저 밑바닥에서 일어날 줄 모르네요.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나겠지만, 아예 오늘은 늦잠자는 깊은 가을 밤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정말 오랜만에 복실이의 깊은 잠, 코고는 소리마저도 아름다운 화음 같이 들리는데 마치 가을 은행잎이 수북한 가로수 길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처럼요... 어제 모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으로 시 낭송을 하시던 낭송가들의 아름다운 시화와 어느 애절한 시를 듣던 백발 고령의 할머니께서 열렬히 치던 박수소리마저도 먼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새벽입니다. 


언젠부턴가 시월의 마지막 날도 기억할 날 중 하나로 자리 잡은듯하죠. 오히려 학원에서는 할 일이 가장 많은 날이라, 사색할 경우의 수를 가능한 줄여놓고, 새 달을 준비하느라 맘이 부산하죠. 특히 학부모상담에 입도 부지런하게, 편지쓰는 손가락도 부지런하게 움직입니다. 오늘은 학원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응급조치활동‘을 학원생들에게 보여줄 프로그램이 있구요. 학생들 간식으로 떡볶이도 준비하는 날,,, 말이래도 원장님 떡볶이가 가장 맛있다는 학생들의 올망졸망한 눈동자와 오물오물하는 입을 생각하며 맛나게 만들어 봐야지요.        


저에게 생각나는 시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시 <즐거운편지>가 있습니다. 학창시절, 제법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 종종 인용하곤 했었죠. 아시다시피, 소설<소나기>를 쓴 황순원작가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고령의 황동규 시인(1938- )께서 새 시집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 시인선 604, 2024)를 출간하셨죠.      


그의 시는 특유의 감수성과 지성이 함께 숨 쉬면서 ‘거듭남의 미학’으로 스스로의 시적 갱신을 궁구하며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현재를 증거오고 있다는 평을 읽었네요. ‘시력(詩歷) 66년, 미수(米壽)를 두 해 앞두고 펴낸 열여덟번째 시집에는 쉼 없는 시적 자아와의 긴장과 대화 속에서 일궈낸 삶의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했다’라고 합니다. 이 시집을 읽기 전에 저는 <즐거운 편지>를 한번 더 읽고, 혹시 그가 쓴 시월 시가 있는지도 찾아보았지요. 오늘이 가기 전 노 시인이 바라본 시월은 어떤 세상일까, 무엇을 노래했을까... 한번 읽어보세요. 

황동규시인의 <시월>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시월(十月) -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 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旅程)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리.     

4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丹靑) 밖으로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 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하는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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