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9.20 박재삼 <가을비>
’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맘으로 결실을 맺어보자 ‘라고 다짐했던 봄날의 텃밭갈이. 6월 하지감자가 기부금을 대주더니 7월부터 줄줄이 주렁주렁 오이, 호박, 토마토 풍년 들어 저도 살찌고 벗들도 살찌우고, 8월엔 한 고추 두 고추 따서 광주리에 모아, 건조기와 햇빛마당 번갈아 가며 말린 고추를 드디어 가루로 만들기까지... 참 수고하고 성실한 모니카에게 칭찬했습니다.
하는 짓이 조금 부실해서, 말린 고추를 공기도 빼지 않고 놓았다가 방앗간 주인을 만나니, 어설프게 붉으족족한 고추, 고운 치마를 입진 못했어도, 저는 마냥 즐겁고 행복했지요. 알갱이가 조금 무거우면 어떻고, 도톰하면 어떤가요. 밭을 갈고, 비료 뿌리고, 고추모를 심어 푸른 고추는 장아찌를 담고, 붉은 고추는 김치 담을 가루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터, 보기만 해도 가슴팍에서 그놈의 사랑타령이 쑥쑥 올라왔지요.
어제 대학생에게 동화수업을 할 때도 자랑하고(학생들은 웬 아줌마 코드인가 싶었겠지만), 학원 수업하면서도 뒷자리에 앉아있는 저 붉은 노을가루를 자꾸만 보고 싶어지고 그랬답니다. 어쨌든, 저는 또 하나의 약속을 잘 지킨 위대한 실험자이자 이야기 꾼이 되었네요. 수업 후 늦은 밤까지, 에세이 원고를 쓰면서도 맘이 즐거운 것은, 저에 대한 믿음의 표시!!
중용의 한 구절, ’ 지성무식(至誠無息)‘!! 이 말이 좋아서 혼자서 ’호‘로 자칭하고, 누가 뭐라 하든 말든, 자연의 성실함에 끼어 살고 싶은 저는 그 이치를 쫒아서 성실한 우주의 운행 속에 몸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천 번 중에 한번 정도는 하늘이 저를 어여삐 여기기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요.
이제 어느 폭설이 진을 치는 날, 저 붉은 고춧가루를 넣은 진한 김치찌개나 감자탕, 아니면 붉은 국물의 생선탕을 먹고 싶군요. 물론 혼자 먹을 순 없겠지요. 그 누군가가 옆에서 소담 소담 손등 두드리며, ’아주 맛있네 ‘ 라며 장단을 쳐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을비는 계속 온다지요. 그렇다고 너무 옥타브를 낮추지 마세요. 일부러라도 한 옥타브 올리시고 그때 나오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으신다면, 뜻하지 않은 좋은 일이 올 거예요. 박재삼 시인의 <가을비>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가을비 - 박재삼
가을 아득한 들판을 바라보며
시방 추적추적 비 내리는 광경을
꼼짝없이 하염없이 또 덧없이
받아들이네
이러구러 사람은 늙은 것인가
세상에는 별이 내리던 때도 많았고
그것도 노곤하게 흐르는 봄볕이었다가
여름날의 뜨거운 뙤약볕이었다가
하늘이 높은 서늘한 가을 날씨로까지
이어져 오던 것이
오늘은 어느덧 가슴에 스미듯이
옥타브도 낮게 흐르네
어찌 보면 풀벌레 울음은
땅에 제일 가깝게 가장 절절이
슬픔을 먼저 읊조리고 가는 것 같고
나는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까나
아, 그것이 막막한
빈 가을 빈 들판에 비 내리네
사진제공, 안준철시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함께 읽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