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봄날 아침편지 160

2025.9.25 박성우 <고추, 우선도로>

by 박모니카


가을비는 촉촉하게 와야 하는데, 축축하게 오니, 모든 것이 너무 무거워지는 아침입니다. 세수할 때 손빨래 하면 다음날 고실거리며 입었던 얇은 옷가지들도 이제는 찬 기온만 맴돌고요. 장맛비에 황톳길 걸으며 아침산책을 즐겼던 어제가 점점 차가워지는 황토살결이 선뜩거려서 산책도 자꾸 게을러지네요. 이제는 오로지 ‘따뜻함’만이 구원의 손길....


이럴 때 박성우 시인의 시집 <웃는 연습> 속에 나오는 60여 편의 시들은 사계절 내내 따뜻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듯합니다. 어제 줌으로 만나는 시 완독회 9월 편으로 박성우시인(현재, 평산마을 책방 작가)을 만났습니다. 지난번 평산에 갔을 때, 봄날의 산책 책방이름이 예쁘다고 했는데,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어린이 책 <아홉 살 마음사전>과 산문집 <시인의 창문엽서>라는 책으로 처음 만났는데, 동시집과 어린이책, 청소년 책 등, 시인의 모습 그대로 순수하고 맑은 시인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쓰는 시인입니다. 시집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 2024. 창비>와 어제 완독한 <웃는 연습 2017. 창비>을 읽고 있노라면, 몇몇 독자들이 말했듯, 시인의 마을에 가서 그대로 살고 싶다 하는 맘이 들 수밖에 없지요.


전북 정읍이 고향이어서 그런지, 시로 쓰인 사투리의 맛과 향은 그대로 제 고향분들이 쓰는 말들입니다. 제가 진한 사골탕처럼 우려내어 낭독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아쉽지만요.^^ 하여튼 시인의 시에 나오는 동네 양반들은 모두가 시인이 됩니다. 소위 ‘호모포에티쿠스’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그를 만나면 시민(市民, 시티즌)에서 시민(詩民, 호모포에티쿠스)으로 바뀌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시민(詩民, 호모포에티쿠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웃는 연습>이 일관되게 품고 있는 질문들이다. 그것은 박성우가 시마다 점지해 놓은 운명의 별자리이기도 한다. 시인은 이 물음을 던지며, 이 세계의 견고함에 틈을 만든다. 틈이 벌어질수록 삶의 맥박은 빨라지고, 호모포에티쿠스의 귀환은 자명해진다- (<웃는 연습> 평론가의 말 중에서)


가을은 공간 속에 머무는 만상들 사이의 틈이 점점 넓어지는 때이지요. 이때 시인과 함께 호흡하는 시민詩民이 되어본다면, 여기저기에서 따뜻한 기제들이 발동하여 더없이 행복한 시간들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낭독했던 <고추, 우선도로>를 들려드려요. 제가 이번에 고추 농사 결실이 좋아서 지금도 그 행복이 진행 중이었거든요... 봄날의 산책 모니카.


고추, 우선도로 - 박성우


볕 따가운 오후에 집으로든다


널찍널찍 널린 붉은고추가

집으로 드는 길을 막고 있다


아, 그새 고추 딸 때가 되었구나

집으로 드는 길목에서

후진으로 차를 뺀 나는

고추가 차지하고 있는 길

가장자리로 걸어서 집으로 든다


그래, 가을엔 고추가 우선이지

해마다 이맘때 길은 고추의 것,

고추가 십년 넘게 이 길을 써왔다


그래, 우리 집으로 드는 길목은

옅은 경사가 있어 볕이 그만이지

우리 집으로 드는 길목에는

우리 집밖에 없어 딱히

누군가 들락거릴 일도 없지


아 참, 한사람 있기는 있다


우체부 아저씨도 당분간은

고추 앞에서 오토바이를 세우고

조심조심 걸어들어와

편지함에 우편물을 넣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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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이미지차용- 옥산동네 풍경과 비슷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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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거둔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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