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h My Life

표류하다 정박하는 백화점 상품권

2021.7.6

by 박모니카

L 상품권의 주인은 언제나 아들 아니면 딸이다. 지금이야 갖가지 상품권이 쏟아져 나와서 돈의 가치를 더 떨어지게 만들었지만 상품권을 받으면 왠지 모를 소중함이 생긴다. 소중하니까 아끼고 아끼다가 시간만 흘러가고 그러다가 상품권의 진짜 주인이 나타난다. 오랫동안 아끼고 손때 묻었던 상품권이 그렇게 새 주인을 만나면 감정이 애매모호 해진다.


처음으로 상품권을 받아본 것은 연애 때였다. 어느 날 남편이 추석 선물이라고 구두 상품권을 주었다. 당시 구두 하면,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이어가 대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몸에 걸치는 것에 특별한 멋을 내지 않았던 나는 상품권을 받는 것 만으로도 아깝고 귀했다. 지금은 그 브랜드의 구두 가격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상품권 하나면 멋진 구두를 살 수 있었다.


그것을 아껴서 엄마 아빠 생일선물로 드렸더니 어느 날부터 남편은 예비 장모 장인의 상품권까지 준비했다.

남편은 나이 40세 바로 밑자락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회사에서는 대학 때의 전공에 따라 해외 무역을 담당했고, 그때만 해도 대기업의 무역팀 과장 정도면 상품권 몇 개 정도는 살만하다고 했다. 어쨌든 나는 그 전까지 공짜를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연애하는 사람이 주는 상품권은 한 장 한 장 받을 때마다 기다려졌다.


일 년에 명절이 두 번 있고, 내 생일도 있었으니, 최소 너댓장의 상품권은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그 상품권으로 온전히 나를 위해 물건을 사본 기억이 없다. 항상 누군가가 나타났다. 엄마 아빠를 비롯해서, 동생이 넷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물건에 욕심이 없었던 성격도 한 몫 있었지만 어려운 형편에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결혼 2년 차, 남편이 실직을 하니, 덩달아 상품권도 잠수모드를 탔다. 오랫동안 상품권의 그림자도 만나지 못하다가, 한 6년전 쯤, 남편의 지인이 설 선물로 L백화점 상품권을 주었다. 평소에 환경보호에 관해 좋은 말씀을 많이 듣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때의 사회상황에서 김영란법이 통과되면서,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범죄처럼 느껴질 때였다. 다행히 지인이 공직자는 아니어서 단순한 선물로 받았고, 나는 그 상품권에 혹 했다.


우리 부부는 이 상품권을 보고서 연애 때의 상품권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곤 했다.

“그때는 참 많이도 받았는데. 난 당신이 회사에서 엄청 잘 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어떻게 결혼하자마자 실직을 했는지. 내가 세상 물정 모르고 결혼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결혼 안했을 거다. 회사라는 것도 참 웃기네. 왜 중간에 사람을 퇴직시키는 거야. 그래서 모두 공무원 공무원 하는 거구나. 오랫 만에 받은 상품권이니까, 진짜 아껴서 써야지. 꼭 내가 필요한 것을 사야겠다.”

“그래. 정말 당신만을 위해서 써. 그리고 묻어두지 말고 지금이라도 쓰던지. 길어지면 꼭 다른 데로 가니까. 그리고 미안하네. 결혼해서 더 잘해줘야 하는데, 우리 각시가 좋아하는 상품권 한 장을 못 갖다 주네.”


그때부터 남편의 지인은 일 년에 한 번씩 꼭 상품권으로 선물을 했다. 우리는 기껏해야 과수원에서 나오는 과일즙으로 대신했다. 그해 받은 상품권은 어떻게 썼을까.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옷을 샀다. 다음 해 받은 상품권은 엄마의 생일 선물로 드렸다. 또 다음에 받은 상품권은 딸의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썼다. 해마다 남편을 통해 받은 상품권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줄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이번에는 꼭 당신을 위해 쓰라고.”


올 설날에도 지인은 L상품권을 보냈다.

“ 당신이 말해서 이제는 안보내셔도 된다고 좀 전해. 그분이 우리만 챙기는 것도 아니고, 매해 받기만 하니까 부담되고. 아니면 우리도 상품권으로 선물하던지. 너무 약소한 보답이라 눈치 보여.”

“그래. 해마다 그렇게 말하지. 근데, 우리도 그에 맞는 선물을 하면 돼요. 손 내밀어 주는데 안 받는다고 사양하는 것도 그래. 난 상품권 받을 때 꼭 당신이 생각나. 우리 각시가 웃겠는 걸 하고 말야. 이번에는 꼭 당신 옷이나 하나 사소.”


벌써 여름이 왔다. 코로나로 대학생활을 답게 하지 못하는 딸이 2학년이 되면서 타지 생활에 시간을 더 보냈다. 내가 하는 봉사활동 ‘필사시화엽서나눔’에서 쓸 엽서를 준다고 일부러 집에 왔다. 방학 때는 독일어 자격공부도 하고, 서울에서 알바도 한번 해볼까 한다고 했다. 주말을 보내고 올라간다는 말에, 옷이라도 하나 사서 보내야지 싶었다. 인생에서 가장 예쁠 때 아니던가. 아무리 청춘이라지만 예쁜 옷 입고 당당한 청춘이 더 멋진 인생이지.

“지원아, 오늘 화장품 떨어진 것도 사고 쇼핑하자. 엄마 오늘은 일찍 수업이 끝나.”

“앗싸. 좋지. 오랜만에 목욕탕도 가자. 물건 안 사도 되니까 엄마랑 같이 있으면 좋아”


내 머리 속으로는 L상품권이 생각났다. ‘아토피로 고생하는데 제 피부에 맞는 화장품 사줘야지. 돈이 남을테니, 내 슬리퍼도 하나사고, 간단히 저녁거리도 사야겠다.’ 라며 출발했다.

L마트의 1층에 있는 화장품 코너로 향하는데, 2층의 옷 전시장이 눈길을 잡았다.


“엄마, 엄마도 이런 원피스 입어바. 엄청 편하고 시원해.” 딸은 내 옷을 본다.

“너는 이런 원피스 안 입어? 너무 예쁜데. 자켓까지 있으니까 단정해보이고 좋네.” 딸 옷을 본다.

“입으면 좋지. 이 자켓 색깔 예쁘네. 그치?” 딸이 말했다.

두말없이, 딸의 옷을 골랐다. 자켓, 원피스, 블라우스. 옷 사장님은 다른 손님들과 달리 이것저것 만지지 않고 기분좋게 산다고, 칭찬까지 했다. 옷값은 상품권의 값을 훨씬 넘었다.

“미안해, 엄마, 이번에도 상품권이 우리 때문에 사라지네.”

“무슨 말을. 우리 딸이 입어서 예쁜 옷을 사는데 얼마든지. 예쁘게 입어.”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상품권얘기를 하니,

“내가 직접 당신에게 상품권을 선물해야겠네. 그래야 당신 것이 될랑가.” 라고 말했다.


당신 딸이 썼으니 얼마나 좋은가 라고도 했다.

그렇지. 내 딸이 썼으니 그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다. 나야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딸 옷.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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