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편지215

2022.11.19 유강희<억새꽃>

by 박모니카

어떤 글이 잘 쓰여진 글일까요. 감정과 이성이라는 시소의 한 가운데에 서보고 싶어요. 제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알면 부족한 면을 알 수 있을테니까요. 오리막(창비)을 쓴 유강희시인은 백석시인의 말을 빌어 전했지요. ‘시를 쓸 때, 자신의 감정과 유리된 시는 진정한 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화려한 말로 수식하지 않고, 진실되게 쓰면 된다. 감정은표절할 수 없고 감정의 무늬를 내 것으로 표현하는 일 그것이 시다.’ 그러나 시를 쓴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아요. 나도 모르게 감정을 벗어나고, 유식한 표현을 쓰려 하고, 다른 이의 감정을 표절하는데 부끄러움을 모르니까요. 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글쓰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솔직함’인 것 같아요. 그러려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솔직해야 되겠지요. 억새꽃이 만발한 주말입니다. 여유, 투명 그리고 솔직함으로 우리의 감정을 가을풍경에 담아 사유해 볼까요.

오늘의 시는 유강희시인의 <억새꽃>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억새꽃 - 유강희


억새꽃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명절날 선물 꾸러미 하나 들고 큰고모 집을 찾듯

해진 고무신 끌고 저물녘 억새꽃에게로 간다

맨땅이 아직 그대로 드러난 논과 밭 사이

경운기도 지나가고 염소도 지나가고 개도 지나갔을

어느 해 질 무렵엔 가난한 여자가 보퉁이를 들고

가다 앉아 나물을 캐고 가다 앉아 한숨을 지었을

지금은 사라진 큰길 옆 주막 빈지문 같은 그 길을

익숙한 노래 한 소절 맹감나무 붉은 눈물도 없이

억새꽃, 그 하염없는 行列을 보러 간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고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억새꽃도 알고 보면 더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제 속에서 뽑아올린 그 서러운 흰 뭉치만 아니라면

나도 이 저녁 여기까진 오지 않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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