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편지253

2022.12.28 박노해 <연말정산>

by 박모니카

오늘 새벽엔 무엇을 읽을까 하고 한 컷을 넘기니 박노해 시인의 글이 보입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에 아침 발자국을 새기듯 책 속의 흰 눈길을 검은 눈동자로 사락사락 걷네’ 이 글을 읽고 어찌 정신이 번뜻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멍하니 앉아있는 저를 본 듯 ‘딱’하고 머리를 치는군요. 내친김에 그의 시 두 편을 더 읽었습니다. <연말정산>이란 시에 꽂히네요. 어제 저도 학원과 거래하는 몇몇 사람들과 연말정산을 하며 인사를 했거든요. 꼭 돈으로 맺어야만 정산인가요. 올해도 고마웠다고 새해에도 더 사랑해 달라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도 정산이지요. 시를 읽다보니 ‘검정콩 다섯 말’이 보이네요. 얼마 전 에세이를 함께 쓴 이정숙작가의 남편께서 당신이 지은 농산물 검정콩을 볶아서 가져오셨어요. ‘아이고야, 이런 환대를 받다니요.’ 아마도 당신께서도 사랑하는 아내를 대신해서 연말정산 하고 싶었을까요. 날카로운 세모를 향한 또 하루가 시작되었어요. 당신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언어의 정산을 해보세요. 아마 세모가 금새 둥그러워질거예요.

오늘의 시는 박노해 시인의 <연말정산>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연말정산 –박노해


시인에게 연말정산을 하란다

공과금 내고 세금 내고도 빚지지 않고

이럭저럭 한해 살림을 잘 살았다

오늘은 햇살도 좋아 빈 들길을 걸어

이웃 마을로 마실을 가는데

김 씨가 장작불을 피워 놓고

공책에 뭔가를 적고 계신다


어여 오셔, 시방 연말정산 중이구먼

도토리묵 있는디 막걸리 한 잔 할껴

쌀 열일곱 가마, 찹쌀 두 가마, 참깨 서 말,

들깨 여덟 말, 검정콩 다섯 말, 메주콩 아홉 말,

밤 열두 말, 옥수수 아홉 접, 고구마 열댓 포대,

사과, 복숭아, 감, 배, 딸기, 매실.… 솔찬히,

배추 삼백 포기, 무우 고만고만, 고추 서른닷 근,

닭 여덟 마리, 달걀 육십 판, 감자, 양파, 쪽파,

상추, 시금치, 브로콜리, 대추, 토마토, 조, 수수,

보리, 쑥갓, 겨자채 아들딸 손주들 먹을 만치


김씨 혼자서,

아니 대지와 기후와 해와 별과 더불어

낡은 경운기 한 대로 올 한 해 이룬 결실

연필로 쓰고 지우며 또박또박 적어 나간

김 씨의 생산물 자간마다 행간 마다에

내가 그의 정갈한 논밭 사이를 걸으며

작물의 숨결과 계절의 빛깔에 찬탄해온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사의

찬란한 대지의 서사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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