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8 브런치 매일쓰기 16
봄에 심은 작물들은 제 몫을 다 하고 물러났다. 수미산 씨감자로 심었던 감자를 수확해서 나눠먹고, 기부금 마련도 했다. 예년만 못했지만 호박도 십여덩이 나와서, 장마비와 코로나로 우울했던 여름내내 호박부침개, 호박생선탕으로 보약이 되었다. 계란의 옆얼굴 같은 보랏빛 가지, 가을대추 닮은 대추토마토는 다이어트 하는 딸과 나의 주 간식이 되었다. 효자 중의 하나가 오이, 그 중 가시 오이는 4개의 모종에서 무려 40여개의 수확을 얻었다. 채소를 싫어하는 남편도 오이 만큼은 맛있다고, 엄마가 담아주었던 고추장에 찍어 먹어, 최고의 반찬거리가 되었다.
텃밭지기 정아네 짝꿍이 각 밭의 풀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었다. 가을에 뿌리고 심을 작물들을 준비하자고 한 후 잦은 태풍으로 때를 놓치다가 드듸어 올 해 김장으로 배추와 무를 심었다. 처음으로 괭이와 호미를 잡아본 아들, 이론에 밝은 농사꾼 남편의 덕으로 감자를 거둔 땅에 배추를 두 줄 정렬로 심었다. 심고보니 꼭 꼼지락 거리는 애기 손 같았다. 혹시나 하여 한판에 모종 120개 짜리를 사서 모두 심다보니, 새 두덕이 필요해서 일품을 더 팔았다.
이틀 뒤 남편은 혼자서 무씨, 당근 모종, 쑥갓씨를 뿌리고 왔다. 가능하면 혼자 나가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내심, 차 속에 있는 씨앗들을 언제 제 땅에 내리게 하나 걱정과 게으름만 쌓여가고 있던 중이었다. 작년 여름 가을은 병원에 있어서 각시가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맘만 있었다고, 올해는 가능한 본인이 하겠다고 늘 말했다.
어제 아침, "당신 오늘 스케줄은 어떤가? 삐끼방에 있는 쪽파 심으러 가세. 혼자가니까 심심하고 일이 더디데."
"삐끼방에 뭐예요? 그리고 오전에 에세이 팀 모임있는데. 인쇄소에서 빨리 글 보내달라고 한데. 큰일이야."
삐끼방은 낚시가방이었다. 쪽파 알은 봄에 대준씨네가 밭정리하면서 버려둔 파종을 남편이 모아둔 것이었다.
모임 빨리 끝나고 와서 같이 가자고, 혼자 가지 말라고 당부하며 나왔다.
점심 후 수업 전까지 두 시간여 밭일 할 시간이 왔다. 오늘의 목표는 쪽파심고, 배추밭 잡풀 뽑기.
마땅히 쪽파 심을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배추를 넉넉하게 심었으니 가장자리 따라 그곳에 심자고 했다.
이 주간 사이 배추밭의 잡풀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있었다. 옆 밭 가경이네 배추는 멀칭 속에서 통통하게 꽃처럼 피워나고 있었다. 봄에만 해도 멀칭 할 힘이 있었는데, 갈수록 체력이 나를 주저 앉혀서 멀칭하지 말고 그냥 심자 했었다. 살아나는 놈만 내 인연이라 생각하고 먹자고. 그런데 풀들을 보니, 쬐끔 후회되기도 했다.
"아이고 모르겄다. 당신이 풀들을 살살 거둬줘요. 얼른 쪽파 심고 갑시다. 갈수록 일을 보기만 해도 지치네."
"허허, 온지 10분도 안됐네. 내가 지나가는 곳에, 구멍을 같이 파줄테니까 당신은 앉아서 한 두개 씩 가볍게 넣기만 하면 되요. 오늘 오후 비 소식이 있으니, 오면 금상첨화지."
삐끼방에 들어있는 쪽파종은 생각보다 많았다. 왠지 어느 동화책에 나오는 두더지가 땅 속에 미로를 만들어 새끼를 낳던 그림이 생갔났다.
" 아니, 왜 이렇게 많지? 쪽파가 새끼를 쳤나바. 그사이에 작은 것들은 더 자랐네."
"종자도 새끼를 친단가? 원래 그 만큼 이었지. 당신 눈이 달라졌고만. 많게 보이는 걸 보니."
쭈그리고 뭘 한다는 것이 보통 힘 든게 아니었다. 우리 생활에 입식문화가 점령한 후, 나 역시도 따뜻한 온돌방 좌식에서 자연스럽게 의자를 선호하는 몸으로 바꿔지고 있었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저절로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나는 엄마의 멘트를 이제는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다.
굵은 파종만 먼저 심었어도 벌써 배추밭 두 두덕을 다 채웠다. 작은 것들은 그냥 버리자고 했다. 저것들도 살아있은 거라 그냥 버릴 수 없지 라며, 남편은 나머지 작은 파종을 옆 두덕에 뿌리고 발로 살살 밟으며 심었다.
"살놈은 살고 안될 놈은 어쩔수 없지.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네." 라며 손을 털었다.
신기하게도 텃 밭을 걸어나오니 살랑살랑 비가 뿌렸다. 맑은 하늘에 내리는 비, 오늘 호랑이가 장가가는가 라고 했다.
살짝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있어 보았다.
"어, 목화솜이야. 코알라가 심었나? 대준씨네 건가? 근데, 이 꽃은 뭐예요? 목화솜이랑 한 가지에 있어."
"당신 그거 사진 한장 찍어봐. 나도 목화 꽃을 본적이 없는데, 잘 됐네."
"올해는 신기한 꽃들을 보네. 얼마전 정아씨 울금 꽃도 진짜 이쁘더라."
농사꾼 3년차 밖에 안 됐는데도 텃밭과 꽃밭의 상생의 이치를 알 것만 같았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가 땅이 있으면 무조건 경작을 한다는 '경작본능'.
인간만 그런게 아니라 씨란 씨도 무조건 뿌리내리려는 '정착본능'
이곳에 사는 생물 종처럼, 인간과 자연 생물이 함께 살아가는 '공유본능'
그렇구먼 힘들었겄네, 힘내소, 잘 될걸세 라고 말하는 '배려본능'
자네가 최고여, 그 말이 맞고 말고, 많이 배움세 라고 전하는 '칭찬본능' 텃밭을 하면서 늘 나 자신에게 되새기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전업 현장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