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13 안도현 <바닷가우체국>
산길 옆에 사는 재미 중 하나는 새소리를 듣는 일, 오늘도 일찌감치 부지런한 녀석들 덕분에 눈을 뜹니다. 발걸음이 무겁게 귀가하는 날이 있는데요, 유독 어제 저녁의 제 모습이 그랬답니다. 일을 할 때는 모르겠는데, 학생들을 보내는 순간이 되면 한꺼번에 몰아치는 고단함. 그럴 때는 스스로 ‘위로’를 되뇌이죠. 사실 이 말은 어제 아침부터 울렸던 소리였어요. 말랭이 문해교육시간에 동화책을 읽고, 노작활동으로 도화지에 손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어요. 자신의 손을 보며 ‘위로’의 말을 하고, 글로 쓰도록 지도했답니다.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일하지 않으면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따르지만 특별히 ‘손‘이 하는 일은 얼마나 고된 일이 많은가요. 어른들의 손 하나하나에 그대로 지난 세월이 주름지어 새겨져 있었습니다. ’위로‘하면 또 생각나는 사람 중, 제주도에서 보았던 소년화가 전이수의 <위로>라는 그림과 글도 생각나구요. 또 며칠째 머리맡에 놓여 있어서 한 두장씩 읽고 있는 이어령씨의 <눈물 한 방울>, 함민복씨의 <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의 문장들은 제게 큰 위로를 선사합니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위로를 주고받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살이라지만 결국 누구나 혼자만이 남는 수많은 시간. 스스로가 주는 위로의 힘이 없다면 쉽게 폐인이 되겠지요. 무엇으로 위로의 씨앗을 뿌릴 것인가 고민되신다면 더도말도 덜도말고 ’시‘ 한 수만 읽어보셔도 될거예요. 혹시나 힘이 난다면 낭독도 해보시고, 더 힘이 난다면 필사해보자고 손에게 부탁도 해보시고요. 그러다가 더더욱 힘이 불끈하고 솟으면 그리운 이에게 편지도 써 보는 거예요. 이 새벽에 저도 또 한 편의 시를 찾아서 제 심지에 꼭꼭 붙여놓습니다. 힘들 때 활활 타오르는 촛불의 빛이 되고 더 힘들면 그 아래 흘러내리는 촛불 농이 되어 볼까 하는 맘에요.
오늘은 안도현 시인의 <바닷가 우체국>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 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