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봄날편지200

2023.11.4 이채 <11월에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by 박모니카

커피잔을 에돌아 흘러나오는 새벽 색깔. 오늘따라 진하게 보이는군요. 날마다 기온이 내려가는 만큼 그동안 따뜻한 공기 속에 숨어있던 입김마저도 스르르 나타날 때입니다. 어젯밤엔 유시민 작가의 인터뷰를 듣다가 잠들었는데요, <당신은 잘살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 -운 좋아서 살아온 인생,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지금부터 ‘좀 더 다르게, 좀 더 사적으로‘ 살아보는 거-라고 말하더군요. 지금의 모습에 어떤 저항을 보이는 다른 삶이 아니라, ’그냥 재미있는 일 하며 사는 다른 모습의 삶‘ ’내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관계를 넓히는 삶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누군가랑 사적 비밀도 나눌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는 삶‘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제 맘과도 비슷해서 ’그렇지, 나도 그래야지‘라고 중얼거렸지요. 오랜만에 긴 통화를 하게 된 딸의 수다 속에 사적비밀을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엄마인 제가 있더군요. 말이래도 ’엄마로서, 인생의 멘토로서, 울 엄마 정말 멋있는 여자야‘라고 해주는 딸의 애교를 듣고 있으니 길고 딱딱했던 하루가 저절로 깊은 고요로 녹아들었답니다. 제 딸이야말로 과한 욕심 부리지 않고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듯해서 대견하다 싶었습니다. 오늘도 주말, 비가 예보되어 있지만 각종 행사들도 즐비하군요. 세대간, 가족간의 형태로 시낭송을 하며 인문학을 꽃피우는 모 행사에 제 학생들이 참여해서 구경갑니다. 오늘도 책방주인의 부재로 말랭이 책방은 심심하겠군요.^^ 그래도 책방지기가 가을향을 품고 싶어서 여행을 간다는데 아마도 너그러이 봐주겠지요. ’오늘 뿐이야. 너가 찾는 다른 재밌는 삶. 너가 만나고 싶은 비밀의 시간들을 즐겨봐‘라고 말해주겠지 싶네요. 오늘은 이채시인의 <11월에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11월에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 이채


말을 하기보다 말을 쓰고 싶습니다

생각의 연필을 깎으며 마음의 노트를 펼치고

웃음보다 눈물이 많은 고백일지라도

가늘게 흔들리는 촛불 하나 켜 놓고

등 뒤에 선 그림자에게 진실하고 싶습니다

피었을 땐 몰랐던 향긋한 꽃내음이

계절이 가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고

여름 숲 지저귀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어디론가 떠나고 흔적 없을 때

11월은 사람을 한없이 쓸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람결에 춤추던 무성한 나뭇잎은 떠나도

홀로 깊은 사색에 잠긴 듯

낙엽의 무던가에 비석처럼 서 있는

저 빈 나무를 누가 남루하다고 말하겠는지요

다 떠나보낸 갈색 표정이 누구를 원망이나 할 줄 알까요


발이 저리도록 걷고 걸어도 제자리였을 때

신발끈을 고쳐 신으며 나는 누구를 원망했을까요

그 길에서 하늘을 보고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는 또 누구를 원망했을까요

하늘을, 세상을, 아니면 당신을

비록 흡족지 못한 수확일지라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말 것을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 것을

한 줄 한 줄 강물 같은 이야기를 쓰며

11월엔 한그루 무소유의 가벼움이고 싶습니다

월명산 할머니들 손길이 가득한 은행..
안준철시인의 사진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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