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0대 한창 무렵에 모임을 시작한 곳이 '발리'였다. 인도네시아의 그 발리가 아니라, 제주 서귀포의 술집 이름이다. 전국을 오가며 20년간 모임을 진행하는 동안 발리는 어느새 상상의 여행지가 됐다.
드디어 지난 11월 말 7명의 회원은 꿈에 그리던 '성지'로 여행을 떠났다. 60대 아저씨들이 발리에서 본 건 무엇이었을까. 여행사의 패키지 투어였지만, 우리는 놀랍고 색다른 발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팔색조의 매력, 발리 여행
발리가 오래도록 인기 여행지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휴양과 관광은 기본이고 각종 액티비티, 문화 탐방, 미식 여행, 종교 체험, 국제회의와 비즈니스 등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급 리조트 단지가 있는가 하면 소박한 로컬 식당은 가성비가 최고다. 제주도 3배의 크기에 걸맞게 발리는 볼거리와 체험 활동이 무궁무진했다. 한마디로 '포용과 다양성'이 아닐까 싶다.
1만 3천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인도네시아는 다종족·다언어·다종교 국가다. 가장 인상 깊은 건 그들의 종교다. 인구의 약 87%가 무슬림이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한다. 그래선지 발리는 90%가 힌두교도다.
현지인들에게 종교는 일상과 다름없었다. 발리 곳곳에서 수많은 사원, 크고 작은 의례 행렬과 마주쳤다. 결혼이나 장례 행렬로 인해 차를 멈추거나 우회하기도 했다. 힌두교는 기존 토착 종교와 결합해 발전하고, 사람들은 힌두교 신뿐만 아니라 자연 속 정령과 조상을 위해서도 의례를 치른다고 한다. 자연과 신, 인간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인도네시아 국가 휘장에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 명시돼 있다고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동남아를 여행하면 개발 속도가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발리는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는 고민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중요한 건 자연을 대하는 방식, 현지인들은 가까운 화산이나 재해마저 삶의 일부로 생각한다고 발리 출신 가이드가 설명한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그들이 놀라울 뿐이다. 지구상에 늦게 나타난 인간이야말로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리 곳곳에는 여전히 왕과 후손이 살고 있다. 행정 통치는 아니지만 해당 지역에서 그들의 존재감과 지도력은 여전하다고 한다. 공동체의 삶과 연대가 살아있다는 의미다. 5층으로 제한된 건축 규정으로 화려한 호텔이나 리조트 단지라도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관광 가이드 또한 내국인만 가능하다고 한다. 천혜의 자연과 오랜 전통을 지키려는 발리 특유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극한 직업’ 덕에 극기 훈련 같은 일정
패키지 투어의 절반인 자유 시간을 위해 모임의 해결사인 '극한 직업' 총장(총무)이 나섰다. 매사 열성파인 그가 열심히 검색해 제시한 동부 투어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인스타 감성의 핫플로 첫손 꼽히는 곳이라고 강추하는데, 60대 아저씨들이라고 빠질 순 없었다. 여행 내내 호텔에서 휴식을 취할 겨를은 없었다.
우리는 새벽 4시에 호텔을 나서 동부의 '렘푸양 사원'(Lempuyang Temple)으로 향했다. 선과 악을 상징하는 웅장한 '천국의 문'과 활화산인 아궁산(발리 최고봉으로 해발 3,142m) 전망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숙소가 밀집한 쿠타(Kuta)에선 차로 2시간 거리에, 사진 촬영 웨이팅에 또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만만찮은 일정이다. 하지만 전 세계 여행자들이 경이로운 풍광을 맛보기 위해 기꺼이 긴 줄을 선다. 우리 앞에는 케냐에서 온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독특한 사원 분위기 속에서 지루할 틈 없이 시간이 흐른다.
멀리 활화산인 아궁산을 배경으로 렘푸양 사원의 '천국의 문'에서 포즈를 취한 여행자.
여행의 의외성, '컬처 쇼크'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서부 해변에 조성된 '비치 클럽'이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렬한 댄스 음악과 함께 우리는 마법 같은 판타지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본능처럼 느끼는 '원초적이며 강렬한 쾌감'이었다. 이방인인 60대 아저씨들까지 뜻밖의 충격 속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곳곳에 풀과 의자, 선 베드, 바가 이어졌다. 수영하는 사람과 함께 칵테일이나 맥주잔을 들고 수다를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 서양식 파티 문화에 익숙지 않은 한국인에겐 무척 생소한 풍경이었다. 대부분이 서양인으로 그중 다수는 호주에서 온다고 한다.
멀리 바다에는 높고 거친 파도가 쉼 없이 밀려들었다. 서퍼들은 파도에 몸을 실으며 아슬아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핑을 즐기고 있다. '비치 클럽'은 2002년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사건(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일으켜 413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등장했다고 한다. 불행한 사건이 한낮의 매혹적인 발리 풍경을 만든 셈이다. 환상적인 자연과 어우러진 발리의 또 다른 매력에 절로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Finns 비치 클럽의 모습. 비가 내린 후라 사람이 적은 편이라고 한다.
함께 어울리면서 찾아가는 삶의 균형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에서 뉴욕의 일상에 지친 여주인공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이탈리아, 인도를 거쳐 발리로 여행한다. 여행은 자신을 찾아가는 리즈의 섬세한 감정 변화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치유의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 속 주술사는 "때로 사랑하다가 상처를 입지만, 그래야 더 큰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세상의 길 위에서 이뤄지고, 삶이란 모든 이에게 배우며 사랑하는 것이라고 리즈는 깨닫는다.
여행은 새롭고 낯선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지만, 결국엔 자기 자신과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발리에서 60대 아저씨들은 뜻밖에도 다양성으로 빛나는 팔색조의 세상을 만났다. 여럿이 섞이는 모임은 이런저런 이견이나 어려움이 따르기 쉽다. 짧은 일정이지만 우리는 매 순간 부대끼면서 서로 어울리고 녹아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느낀 어떤 균형의 감각도 남다르게 다가왔다.
모임의 20주년 기념 여행은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고 감사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을 통해,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인연에 감사하며 소중한 하루를 시작한다
* 표지 사진: 발리 동부 카랑카셈 리젠시에 있는 Royal Palace on the Water. 아름다운 전통 건축과 물 정원, 발리 왕족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매혹적인 관광 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