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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an 09. 2021

특별시의 여행, 애환의 단골집이여 잘 가라

- 내 인생의 골목길 여행 3편

1985년 특별시에 입성했다. 7년 전 고등학교 시절 광역시 광주에 적응하는데 나는 이미 얼마간의 대가를 치렀다. 아침 통학 버스의 메스꺼운 냄새와 열기 자욱한 학원은 도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특별시는 또 달랐다. 워낙 큰 탓인지 체감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학교나 직장 근처의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하루가 흘러갔다. 처음에 대학원 2년간은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라 말이 특별시민이지 노는 나와바리가 뻔했다.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어떤 책의 제목처럼 변두리를 어슬렁거리는 신세랄까. 특별한 ‘껀수’가 있을 때나 차를 타고 번화가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 세계는 크고 넓었다.


20대는 무한한 기회와 가능성의 시기다. 아직 ‘긁지 않은 복권’ 이기 때문일까. 누구에게나 모든 문이 열려 있다.  문은 나를 성년의 세계안내했고, 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본격적인 인생 여정을 시작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스승이었고, 내가 접한 세상은 또한 인생의 확장이었다. 나는 빠르게 로컬에서 내셔널로, 지역구에서 전국구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낙성대역 주변의 ‘큰별치킨’이나 허름한 선술집, 포장마차에서 학우들과 어울렸다. 술 한잔하고 기숙사까지 휘청휘청 걸어오는 밤길은 어둡고 호젓했다. 가슴 깊이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호기롭게 노래를 부르곤 했다. 차도 사람도 드문 캄캄한 들판 사이로 노래는 한줄기 바람처럼 퍼져가는 것 같았다. 통금이 지난 시간에는 여학생 기숙사 쪽 '개구멍'을 통해 잠입했다. (거기 잔디밭에 놓아기르던 토끼들이 불현듯 생각난다.)


신림역 근처 구불구불한 골목순대집도 그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은 곳이다.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밤 1시가 넘어 주인은 먼저 가고 친구 호일이와 단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던 그 밤은, 술의 정의처럼 남아있다. 음악다방에 우리가 좋아하던 조동진의 신곡이 없자, LP판을 사서 기증한 후 갈 때마다 신청해서 듣고는 했다. 


학교와 기숙사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특히 기숙사는 시골 출신(서울 아니면 모두 시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저녁을 함께 보내는 곳이라 절로 끈끈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한 달에 한번 나오는 특식(통닭 반마리)을 안주삼아 잔디밭에서 맥주를 비우기도 하고, 문득 에 바람이 들면 휘파람을 불며 낙성대 길을 걸어 내려가곤 했다.


그때 만난 전국구 4인방은 평생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출신지도 약속이나 한듯이 경기, 충청, 경상, 전라였다. 우리는 여름방학 때 고향 방문의 깃발 아래 미니 국토 여행을 떠났다. 경기도 오산에서 충남 연기로, 경부선을 타고 부산을 찍은 후 광주의 무등산에서 마무리하는 여정이었다.


부산의 태종대에서 생선회를 처음 맛보는 인생 체험을 했다. 태종대 해안가에 차려진 좌판이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비릿한 바다 향이 입안을 돌다 온몸의 세포를 저릿하게 자극하는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파도가 치는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말할 수 없는 오묘한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서해에 면한 영광 출신이지만 줄곧 내륙쪽에서 살았던 내게는, 여름에 가던 해수욕장이 바다의 전부였다. 아직 초딩 입맛이라고 해야 할까. 미나리나 쑥갓처럼 향이 강하거나 비주얼이 거시기한 포장마차의 안주류는 비호감이었다. 사회 물을 먹으면서 입맛도 변하듯이, 복집 같은 데 가면 이제 “미나리 추가”가 절로 나오니 역시 인간은 변화와 적응의 동물이다.


음식은 한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이 담겨 있다.

 



1987년 입사 신고를 했다. 

서울의 광화문이 사무실이었다. 교보문고 뒤 피맛골을 비롯한 청진동 뒷골목이 활동의 주요 무대. 점심에는 무얼 먹을까 이리저리 배회하고 어둠이 내리면 뒷골목 술집을 전전했다. 대한민국 대표 맛집과 술집, 간판 해장국집이 몰려있는 곳이 바로 그 동네 아닌가. 사무실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저녁에 삼삼오오 모여 한잔했다. 날씨가 영 꾸지리하거나 번개팅으로 의기투합하면 그날은 '함께 퇴근하는 날'이었다.


예전에 책 한 권 마치면 ‘책거리’를 하듯이 직장인들에게는 시시때때로 회식이 있었다. 환할 때 사무실에서 하는 회의보다 거하게 한 잔씩 돌리는 분위기가 격한 동지의식을 자극했다. 회사 뒤 삼겹살집 ‘수송옥’이나 김치찌개가 간판 메뉴인 ‘미성식당’은 구내식당이나 다름없었다. 마성의 맛집, 마약 같은 술집들이 즐비했다.


어느 겨울 한잔 얼큰하게 걸치고 집에 가려다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자, 피맛골 단골집에 들러 따끈한 정종을 마시던 날이 생각난다. 거기에는 열차집, 우정, 대림 같은 허름한 가게들이 무장해제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비집고 올라가 천장이 낮은 2층 방에 들어가면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 언제든 정겹게 맞아주는 고향집처럼.


교보문고 ‘경원집’도 자주 들렀다. 족발에 함께 나오던 재첩국이 좋았는데, 아예 냄비 째 갖다 주면 손님들이 알아서 덜어 먹었다. 유명한 분도 가끔 보였고, 알만한 동료들도 종종 마주쳤다. 재개발을 거쳐 지금 그 자리에는 높은 빌딩(D타워)이 들어섰다. 경원집은 그래도 경복궁역 쪽으로 옮겨서 단골을 계속 받았다. 한복 입은 아줌마와 이마가 꽤나 시원해진 주인 남자가 늘 웃는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이전 후에도 추억의 선수들과 그 집에서 만나곤 했지만 어쩐지 옛날 기분만큼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종내에는 한복대여점으로 바뀌고 말았다. 내 청춘의 소중한 한 페이지를 잃은 기분이었다.


영원한 안주 족발과 피맛골에 있다 자리를 옮긴 열차집의 최근 모습. 예전의 정취가 아스라하다.




단골집들은 하루의 피로에 지친 직장인들의 저녁을 위로한다. 지금 그 피맛골은 무늬만 남아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오가던 좁은 골목길이었다.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 합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겨운 골목길, 사람 냄새가 물씬하던 시절이었다.


단골집이 사라지면 우리의 추억이 함께 사라지는 것 같다. 지금 청진동 골목길은 예전의 모습을 찾을 길 없고, 가까스로 남은 몇 집이 옛 정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청진동 해장국이나 열차집은 그나마 근처에서 손님을 맞는다. 그리움만 여운처럼 머무는 곳이다.


젊음을 함께 했던 단골집들이여 잘 가라. 그래도 그 시절, 내 인생은 무언가를 찾아 살아 있었고, 자주 즐거웠으며 가끔은 아쉬움으로 서성이기도 했다.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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