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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Dec 27. 2020

청춘의 여행 – 방황을 허하라

- 내 인생의 여행 2편

유년의 추억은 어렴풋하게 빛이 바랬지만 행복한 날이었다. 인생의 무게도 근심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만큼 나의 첫 골목길은 정겹고 소박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여행은 ‘청춘의 방황’이다. 


광역시 광주는 넓고 큰 도시였다. 기대와 설렘으로 출발했지만, 도시가 주는 놀라움과 충격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도시인의 자격을 갖추는 데는 치러야 할 대가와 적응 시간이 필요했다.      


읍내에서는 골목길을 통했지만 이제 학교 갈 때도 버스를 타야 했다. 8번 시내버스는 광주 북쪽에서 출발하여 시내를 빙빙 돌아 손님을 통조림처럼 채우고 남쪽의 학교 근처 종점으로 운행했다. 중간쯤인 무등경기장(현재 프로야구 챔피언스필드 구장) 앞에서 내가 탈 때는 초만원이어서 버스에 올라타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역이었다. 버스에 뒷문 하나만 있던 시절, 추억의 ‘안내양’이 정류장마다 손님들을 짐짝처럼 밀어 넣는 게 일과였다. 임무를 노련하게 완수한 안내양 누나가 아직 반쯤 열린 차의 문턱에 걸치듯 서서 “오라이”하고 외치는 것이 흔한 아침 풍경이었다. 메스꺼운 차 냄새를 무척 싫어했던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면 멀미 기운으로 속은 울렁거리고 세상이 어지러웠다. 극기 훈련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특유의  냄새, 도시 냄새에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멀미가 사라지고, 여학생들의 모습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얀 칼라의 예쁜 교복을 입은 중앙여고 학생들이었다. 학교 앞의 가파른 등굣길을 올라 새로운 친구들과도 조금씩 친해졌다.      


처음 학원에 갔다. 콩나물시루처럼 학생들이 들어찬 교실은 열기가 가득했다. 시골에서 한가롭게(?) 지낸 나는 도시 학생들은 이렇게 공부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광주의 랜드마크라 할 전일빌딩 뒤편 대의동이 학원 골목이었다. 청산학원, 한림학원, 양영학원 등 이름도 그럴싸했다. 남녀 공학이 없던 시절, 학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여학생들의 모습에 가슴이 은근히 설레기도 했다.      


광주의 중심 거리인 금남로와 충장로 뒷골목을 무던히도 헤집고 다녔다. 금남로 초입에 있던 YMCA 건물 1층의 탁구장은 어릴 적 영광 출신 친구들의 단골 모임 장소였다. 광주로 진출한 친구들은 탁구에 푹 빠져 허구한 날 거기서 만났다. 우리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영광읍내에서도 함께 몰려다니며 야구, 축구, 농구 등 이런저런 운동을 함께 했다. 나는 약골형에 가까워 대체로 운동하는 게 고만고만했다. 그래도 유년 시절 덕분에 나이들면서 운동과 건강을 챙기는 생활이 자연스러워졌다. 탁구를 친 후에 우리는 광주의 명동인 충장로 골목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놀았다. 청원모밀이 단골이었고 왕자관의 짜장면도 즐겨 찾았다.


충장로에는 밥집부터 술집까지, 쇼핑에서 영화까지 모든 놀거리, 즐길 거리가 널려 있었다. 젊음의 발산지였고 활력의 충전소였다. 우울하거나 별 볼 일 없을 때 가면 무언가 재미난 일이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특히 ‘우다방’은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만남의 장소다. 광주우체국 앞 길거리 어디쯤의 별칭이다. 단골 모임 장소는 우다방 앞 거리의 나라서적, 근처에 삼복서점, 궁전제과도 있다. 단골 서점에서는 80년대에 이른바 불온서적이나 판금도서를 비밀리에 팔았다. 손님의 인상착의를 매의 눈으로 확인한 후 비밀 서랍을 살짝 열어 책을 내주곤 했다.     


2010년대 중반 충장로 거리의 저녁 풍경(왼쪽이  우다방)




시대는 어두웠고 소란스러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5.18을 겪었다. 학교가 한참 문을 닫았고, 같은 반 친구 하나가 도청 앞 발포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7월 경인가, ‘대학 본고사 폐지와 졸업정원제’ 전격 실시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격랑의 시대였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었다.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인 시위 현장이었다. 동아리(그때는 ‘서클’)는 단연 ‘이념 서클’이 대세였다. 대학은 고등학교와는 전혀 딴판이었고 다른 세상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내게는 전공 선택이 고민이었다. 나는 국어나 국사 같은 과목을 좋아했고 문학 계통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엔 졸업 때 '잘 팔리는' 경영대에 입학했다. “항상 입맛에 맞는 떡을 먹을 수는 없다. 때로 떡에다 입을 맞춰야 하는 게 세상이다.” 그즈음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다. 나는 학교에 별로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1학년에 이념 서클에 가입하여 엠티와 토론회도 참가하며 활동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시도하지 않는 젊음은 가치가 없다."

어느 날 친구 두일이가 내게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두일이는 이념 서클과 학생 운동에 열성적이었다. 캠퍼스를 자신 있게 활보하는 친구가 멋있었다. 나는 여전히 갈길을 찾지 못한채 헤매고 있었다. 그간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만 살아온 것 같았다. 내 생각은 없고 주관은 뚜렷하지 않았다. 어릴 적 시골 학교에서는 공부  하면 반장이나 임원 같은 걸 했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학생이었지만 말 잘 듣는 학생, 소심하고 내성적인 범생이였다.      


어릴 때 나는 의협심에 불타는 폼 나는 무술 고수의 내 모습을 그려 보곤 했다. 동네에서 껄렁거리는 놈팽이들을 제압하는 그런 멋진 형님말이다. 웅변대회 시간에 운동장에 줄지어 선 학생들 앞에서 “이 연사, 힘차게 주장합니다”라며 사자후를 토하는 꿈을 꾼 적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제는 나만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부모의 보호, 안락한 생활, 안전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는데, 어쩌면 나는 고생을 좀 해봐야 했다.      




1980년대 시대의 아픔과 민주화의 진통을 함께 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인생의 진로도 나를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가끔은 망가지고도 싶었다. 나이트클럽에 가서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술을 마시고 취하면 잠시 범생이 모드, 맨 정신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광장과 큰길보다는 아직 골목이 편안했다. 충장로 술집을 전전했다. 라면에 막걸리를 마시고 쓴 소주를 들이켰다. 그 시절의 단골집, 무진주의 명물 삼겹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인생의 무게를 절감하는 시기였다. 괜히 심각했고 쓸데없이 진지했다. 치기 어린 방황의 날이었다. 별 특별한 일도 없는데 삼십 며칠 연속 술을 마신 날도 있었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인생의 어떤 허기가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듯했다. 1983년인가 소설 <대학별곡>이 큰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학번들의 고뇌와 방황을 그린 청춘의 보고서였다. 마치 내 얘기인 것 같처럼 가슴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 얼마간 쫓아다닌 여학생이 있었다. 편지를 쓰고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외수의 만화형식의 우화소설인 <사부님 싸부님> 같은 책이다. 그녀와 무슨 말을 나눴을까. 기억 속에 어렴풋하지만, 나는 여전히 치기와 방황의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랑을 구하는 자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그녀를 만난 곳과 분위기만이 어두운 기억 속에 각인되어 떠오른다. 그때는 카페라는 이름보다는 다방이나 커피숍이었고 레스토랑이나 경양식집이 많았다. 화랑과 미술상이 밀집한 예술의 거리에 있던 ‘섬’이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었다.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는 어떤 시처럼, 내부는 밝고 깔끔한 편이었는데 늘 손님은 별로 없었다. 왠지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의 섬, 너무 조용해서 우리의 엇갈린 대화가 멀리 퍼질 것만 같았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랑을 찾던 시간도 그녀의 표정처럼 무심히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오만했고 사랑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나는 스물셋에 집을 떠났다

방황으로 기억되는 광주의 골목길을 떠났다. 좁은 골목길은 한잔 술을 권하며 내 마음을 어루만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곳에도 오래 머물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내게는 고생과 모험이 필요했고 더 큰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 사진 > 무등산 쪽에서 본 최근 광주광역시 원도심 풍경(가운데 낮은 건물과 아래 전체가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가운데 위쪽 까만 빌딩(광주일보사) 쪽이 충장로. 건너편 하얀 건물이 전일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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