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Dec 05. 2020

시간을 멈추게 하는 기술

- 최고의 인생 여행 '시간의 점'을 위하여

30대 후반 늦은 나이에 떠난 해외 연수 시절, 잘 안 되는 영어로 고전하던 내게 유일한 위안은 여행이었다. 토론 수업마다 침묵과 암중모색으로 버티던 2000년 어느 무렵이다.


다트무어(Dartmoor)를 여행하던 때가 떠오른다. 영국 남서부 땅끝마을(Land's End)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광활한 고원지대인 다트무어는 남북으로 40km, 동서로 32km, 평균 해발고도 518m에 이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무지 국립공원에는 특유의 바람과 기후를 견디고 살아온 헐벗은 대지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기묘하게 생긴 바위산들과 함께 자아내는 대자연의 풍경이 독특하다. 여행자의 마음이 애잔해지는 순간이다.           


Dartmoor 풍경


무어(moor)는 황무지, 황야란 의미로 특히 ‘히스(heath)’가 자라는 잉글랜드의 고원지대를 말한다. 히스는 진달래과의 관목으로 주로 흰색이나 붉은색의 꽃이 피고 1m 내외로 자란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이름이 히스클리프(Heathcliff)다. ‘절벽에 핀 히스꽃’이란 뜻이다. 작품의 배경 역시 히스꽃이 만발한 황량한 들판이다. 전편을 압도하는 질풍노도의 드라마에 딱 어울리는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최북단 하이랜드(Highland)에서는 척박한 자연이 빚어낸 야성미와 적막감에 깊이 매료되었다. 화산활동과 빙하 작용이 빚어낸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깎아내린 듯한 바위가 어우러진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스산하다. 거친 기후 탓에 큰 나무나 숲은 보이지 않고 작은 풀과 잡초, 고사리류 같은 양치식물, 야생화인 히스만이 자라기 때문이다. 이런 삭막하고 쓸쓸한 풍경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거기에 인간이 만든 길과 도로들이 길고 아스라이 이어진다.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벌거숭이 산과 메마른 들판은 고원의 기후가 빚어낸 자연을 말없이 보여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묵묵히 만들어진 작품이랄까? 위대한 자연 앞에 그 순간,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동시에 마음속 깊이 위안과 평화를 느끼며 꿈처럼 아늑한 상태에 잠기게 된다. 자연이 우리의 심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순간이다.        

   

황량하고 압도적인 장소들은 인간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를 '숭고미'(崇高美)하고 말한다. '숭고하다(sublime)'는 것은 광활하게 트인 대지, 거대한 산맥이나 사막, 경이로운 바위와 절벽 같은 대자연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예쁜 꽃이나 봄의 초원 같은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유구한 시간의 피조물인 자연의 섭리와 위대함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것이다. 자연은 경외와 존경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은 침묵과 경탄에 잠긴다. 동시에 마음의 평화와 정신의 고양을 느끼는 것이다.        

  



영국의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하이랜드 같은 고원지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뀐다. 흐리고 비가 자주 온다. '나쁜 날씨란 없다. 옷을 잘못 입고 나왔을 뿐'이란 영국 속담이 있다. 악천후를 대하는 그들의 일상이 느껴진다. 비가 자주 오지만 연간 강우량은 우리보다 적다. 대신 시도 때도 없이 조금씩 자주 내려 공기는 깨끗한 편이다. 영국 연수 시절 한 번도 세차를 한 적이 없다. 기온도 비교적 온화하여 겨울에도 들판의 잔디는 푸른색을 띤다.     


Scotland Highland 풍경

                             

스코틀랜드에는 글렌(Glen)으로 시작하는 지명이 많다. 화산활동과 빙하의 작용으로 형성된 길고 깊은 협곡 지대를 말한다. Great Glen은 스코틀랜드 북부를 남서로부터 북동으로 가로지르는 긴 골짜기로 3억 5천만 년된 단층이다. 협곡을 따라 많은 호수와 하이킹 코스, 절경이 이어진다. 괴물 네시로 유명한 Ness 호수가 있다.  

Great Glen 남서쪽에는 세 자매 봉우리로 유명한 Glencoe가 있다. 영화 '007 스카이폴'의 촬영지이고 1692년 '글렌코 학살'이라는 비극의 무대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 윌리엄 3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거부한 스코틀랜드의 맥도널드 가문을 몰살시킨 사건이다.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적개심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스카치위스키 명가 중에는 '글렌 형제'들이 많다. 한국인에게 인기 있는 글렌피딕(Glenfiddich, '사슴'(fiddich)이 트레이드 마크다), 싱글 몰트의 효시인 글렌리벳(Glenlivet)을 비롯하여, 글렌모렌지(Glenmorangie), 글렌 그랜트(Glen Grant), 글렌 모레이(Glen Moray) 등이 있다.


다트무어와 하이랜드 여행은 내게 여행의 정의처럼 남아있다. 오랫동안 나를 매혹하였고, 이 순간에도 마치 그날처럼 눈에 선하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나는 문득 거칠고 황량한 고원에 가 있다. 2000년 여름 어느 순간에 고정된 그 시간은 나와 함께 평생을 지속하며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쓰러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 윌리엄 워즈워스, 서곡(The Prelude) 중에서       


   

자연주의 시인으로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스무 살에 알프스 여행을 했다. 그때 보았던 거대한 자연의 한 풍경은 평생 머릿속에 남아 시인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곤 했다. 이렇게 기억에 떠오를 때마다 가슴속에 파고들어 힘을 주는 자연 속의 한 장면을 워즈워스는 ‘시간의 점’(spots of time)이라고 불렀다.     



  

시간은 흐른다. 붙잡아 둘 수 없다.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하여 기록하고 보존한다.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은 사진이나 기념품, 글이나 그림 속에 고정되어 남는다. 여행이 주는 행복을 꼽으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의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우리가 힘들 때 떠오르는 아름다운 순간들은 여행이 주는 소박하지만 강렬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새로운 여행을 꿈꾸는 것이다.    

 

     

살면서 사진처럼 어떤 장면을 마음에 저장할 필요가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자주 마음에 새겨 두어야 시간이 천천히 지나간다. 때로 어느 장면에 기억이 멈춰 있기도 하다. 그러면 삶의 매 순간이 보다 생생하고 의미 있게 느껴진다. 평소에 중요한 순간들을 마음에 담아두는 훈련을 해보자.     


‘이 순간을 기억해!’ ‘삶이란 정말 좋은 거야’.


기분은 좋아지고 활기찬 느낌이 든다. 반복적인 훈련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차츰 모든 변화의 출발이 되고, 여행을 하는 것처럼 즐거운 인생으로 바뀌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주로 자연 속에서 ‘시간의 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외려 가까운 데서 느낄 수 있다. 엄마가 차려주신 구수한 호박 된장국, 사랑하는 사람과 바라보던 숲 속의 별 빛들, 흰 눈 내리는 거리를 지날 때 문득 흘러나오던 추억의 음악... 이런 모든 순간들은 우리에게 멈춰있는 시간이다. 우리 인생의 아름답고 소중한 한 장면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친 우리를 위로하고 회복시켜주는 힘이 아니었던가.     

    

여행하듯 날마다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어떤 새로운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전 01화 여행은 인생 자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